그저께는 아빠의 기일이었다. 그다음 날이 바로 주말이라 함께 아빠 산소에 가자고 입을 맞춰 둔 터였다. 지난날에 어떠한 핑계로든 자주 가지 못했던 그곳에 올해부터는 조금 더 가보자고 약속했다. 제사를 지내느라 늦은 저녁을 먹었더니 차에 타는 얼굴들이 하나 같이 퉁퉁 부어 있다. 그들의 첫 번째 목적지는 휴게소다. 우리 세 자매는 입을 모아 운전하고 있는 엄마에게 말한다. 반드시 OO 휴게소를 가야 한다고. 고속도로를 탔는데 휴게소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건 인지상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휴게소의 호두과자를 반드시 입 안에 넣어야 했다. 지난겨울, 막내동생의 졸업식을 끝내고 가던 오늘과 같은 길에 찾은 맛집이었다.
아빠가 떠난 후엔 고속도로의 휴게소를 들리는 일 같은 건 한참 동안 없었다. 그래서 휴게소에 들러 호두과자와 우동 같은 걸 사 먹는 일이 내게는 언제나 그리운 장면이다. 맘만 먹으면 할 수 있게 된 지금도 어쩐지 갈 때마다 들뜬다. 증폭된 그리움은 들뜸이 되었다. 아주머니께 이 호두과자가 너무 맛있어서 일부러 여기로 왔다며 너스레를 떨고는 몇 알을 더 얻어냈다. 고작 몇 알인데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다.
와, 진짜 맛있지 않아?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기쁨을 누군가도 고스란히 느끼길 바랄 때 끊임없이 질문한다. 제안하거나 두고 보지 않고. “저 하늘 좀 봐 너무 멋지지?”, “너 지금 행복해?”와 같이 다소 낯 간지러운 질문도 척척 해낸다. 내가 이만큼 좋다고 너도 이만큼 좋을 리는 없을 텐데 내 맘과 같은 대답이 나오길 바라고 믿으면서.
아빠를 도대체 왜 산에 묻은 것이냐며 무성한 풀숲을 헤치며 툴툴거린다. 백 퍼센트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저 추임새에 가까운 말이라 보면 된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꽤나 근사하기도 할 뿐더러 고향을 사랑하던 그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심은 적도 없는 어여쁜 꽃나무가 아빠와 함께 우리를 반긴다. 아카시아꽃이었다. 어디서 날아와서 이렇게 펴 있느냐고 놀란 목소리로 엄마가 알려주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과 달리 지금은 도시를 더 선호하는 엄마이지만, 처음 본 꽃과 나무와 작물들을 단번에 맞춰내거나 우거진 산속을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볼 때면 과연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아카시아는 과거에 아빠가 알려준 장난감이었다. 아마 출처 모를 아카시아가 피어 있는 이 곳과 멀지 않은 데서 그 놀이를 전수받았을 거다. 아카시아 잎이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 내게 건네던 장난기 서린 목소리와 눈동자를 기억한다. 가위바위보를 해 이긴 사람이 손가락으로 나뭇잎을 튕겨내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뭇가지의 잎을 전부 떼어내면 이기는 놀이었다. 지금보다 어렸던 한때에는 아카시아 잎이 보이면 엄지와 중지에 가지고 있는 최대치의 힘을 발휘해 툭툭 쳐내던 고사리손의 역사가 있다. 아빠도 아빠의 아빠에게 배웠을까. 아니면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유행하던 놀이였을까. 나는 아빠에게 전수받은 그 놀이를 동생들에게 물려주었다.
아빠의 이름이 새겨진 돌 뒤로 그가 살아생전 즐겨 마셨던 소주를 시원하게 뿌린다. 늘 그렇듯 그의 술잔을 채워 주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