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게스트하우스에서 보냈더니 새로운 이를 맞이하고 보내는 게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 하루를 앞둔 날에는 나를 제외한 숙소에 있던 모든 사람이 체크아웃을 했다. 사람들을 전부 보내고, 흐린 날씨에 걸맞게 조용하고 요란하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숙소에서 멀지 않고 커피가 정말 맛있는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서점에 가서도 책을 한참 읽다 왔다.
이 주 전에 묵었던 숙소로 다시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체크인 담당 스텝을 이미 알고 있었다. 떠나기 전의 하루를 함께하기로 미리 약속해 둔 돈독한 사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그녀와 공용 공간의 배 모양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장소를 물색하는 동안, 오늘의 새로운 손님들이 속속들이 이 공간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몰랐다. 그들이 내 마지막 선물 같은 하루의 등장인물이 될 줄은.
늦게 잠자리에 들어버렸다. 새로운 손님들과 어둠이 내린 한참 동안 별것 아니면서도 별것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을 때도 늦은 시간이었는데 새벽 산책까지 감행한 탓이었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잃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다음 날 아침 조식을 포기하고 잠을 택한 나는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나와 공용공간의 문을 열어야 했다. 그러자 어제 만난 손님 1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원래라면 그와의 인연은 어젯밤에 끝이 났어야 했지만, 마침 그의 오전 계획이 틀어져버린 것이다. 반가운 재회였다. 늦은 아침 시간에 그의 등장이 더 반가운 이유는 그가 셰프라는 점이었다. 무르익은 지난밤에는 근사한 파스타를 대접해 주더니, 모두가 잠든 새벽에는 맛있는 국까지 끓여 놓았다. 받는 것도 없이 나눠 주기만 한 그는 자신만의 중요한 일정을 위해 먼저 떠났다.
남은 사람은 나 포함 네 사람이었다. 여행의 특징이 돋보이는 하루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생판 모르는 타인과 하룻밤 만에 절친한 친구가 되는 것. 둘씩 나누어 다른 차에 올라탔다. 나와 함께 차를 탄 사람은 손님 2였다. 이동하는 내내 그를 열심히 관찰한 결과,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가 틀림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나를 열심히 묻고 또 자신을 열심히 대답해 주었다.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미소를 지닌 그와 딱 맞는 성격 덕분에 이동 시간이 무척 편안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오름에 도착했다. 나는 이곳을 전에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어서 지금쯤이면 인파가 잦아들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해져 있어 조금 놀랐다. 그래도 우중충했던 숙소 근처의 날씨와는 달리 파란 하늘이 드문드문 보여 다행이었다. 오르기가 힘든 곳은 아니었지만, 경사 높은 오르막길에 조용히 각자만의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만난 정상은 기분 좋은 바람과 들뜸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여러 개의 좋은 기분이 합쳐져 위력은 배가되는 듯했다. 오름의 푸르름도 우리를 사로잡기에는 충분했지만, 더욱이 우리를 반하게 했던 포인트는 잔뜩 무리 지은 구름 사이로 은은히 드리워지는 빛이었다. 금방이라도 신이 내려올 것만 같다며 유치한 호들갑을 잔뜩 떨어 댔다.
배가 고파진 우리는 생일을 맞이한 손님 3의 추천 맛집으로 향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주어 고맙다며 생일 턱을 낸다는 그였다. 인도 요리 전문점이었는데, 이런 건 누가 사줘야만 먹는 음식이니 한번 먹으러 가 보자며 호쾌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가 툭툭 내뱉는 말들은 유쾌하면서도 재밌어서 굳어진 분위기를 편히 풀어내는 데에 아주 적합했다. 분명 어디서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아 할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식당의 외관은 그가 저장해 놓은 장소들의 목록이 궁금해질 정도로 예뻤다. 그런데 놀라운 건 내부가 더 예뻤다는 것이다. 생일을 맞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어쩐지 내가 생일의 당사자가 된 것만 같았다. 제주에서 먹는 인도 음식은 색다른 분위기를 선사했고 처음 시도해 보는 음식도 있었지만, 입맛에 무척 잘 맞았다. 분명 남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우리는 그릇을 싹싹 비웠다. 배를 탕탕 치며, 이다음으로 이어지기에 걸맞은 장소를 하나 더 추천받고는 그와 잠깐 헤어졌다.
세 명이 된 우리는 커피를 테이크 아웃한 뒤, 제주 서쪽의 바다로 향했다. 지금껏 있으면서 서쪽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여름의 제주 여행 때도 동쪽에만 머물렀던 나다. 동쪽이 좀 더 고즈넉하고 조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명 여러 가지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기는 했지만, 이날 저녁의 해 질 녘 풍경이 다음번의 서쪽 여행을 기약하게 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은 장면에 속하여,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함박웃음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녔다. 신이 난 흔적이 잔뜩 묻은 행동들과 함께 말이다. 팔짝팔짝 뛰어다니고 장난스러운 짓들을 연신 해대며.
조금 전, 추천받았던 장소는 LP 바였다.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는지 낯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대화를 이어 나가기보다는 음악에 귀 기울이게 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어젯밤 인연이 닿았던 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LP 바에서 보낸 시간 내내 함께하지는 못 했어도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람까지 만나게 되니 너무 즐거워서, 끝나가는 하루가 너무 아쉬워서 이 시간을 지겹게 끌어보고 싶어졌다. 모두가 같거나 비슷한 마음인 듯했다. 그게 나만의 착각일지라도 아무렴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별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함께 별을 보러 가기로 했다. 다 같이 그런 낭만적인 걸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별을 보기로 한 장소는 눈밭이었다. 나는 시력도 그리 좋지 않고, 어두우면 더 잘 보이지 않는데 눈이 밟힌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별을 보기에는 힘들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겉옷을 뒤집어쓰고는 목이 빠져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온 얼굴에 자꾸 둔탁한 비가 떨어지는 데도 눈을 비비며 한참을 올려다봤다.
어? 어!!!
선물처럼 커다란 반짝임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것들은 금방 하늘을 잔뜩 메워버렸다. 별의 정원이었다. 정원의 끝과 끝을 세어 보고 싶어서 서 있는 자리에서 계속 빙빙 돌며 이쪽저쪽 하늘을 열심히 훔쳐봤다. 우리가 차지한 하얀 공간에는 그저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만 남겨졌다. 가끔은 작은 감탄사도 튀어나왔다. 고작 몇 분의 짧은 시간뿐이었던 선물이라 더욱더 귀해지는 듯했다.
미리 사둔 와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와인으로 마지막을 마무리하기로 한 건 아무래도 탁월한 선택인 것 같았다. 혹여 와인을 마시다 취해버려도 완벽할 것만 같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