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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스 Oct 03. 2023

#2: 로마 (1)

첫 로마, 그리고 와인

    어느 공항에 내렸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다 빈치 공항이지 않았을까. 공항에서 시내로는 기차로 들어왔다. 기차 안에서 본 풍경은 내가 생각했던 로마와는 달랐다. 보통 국제공항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졌기에 그 사이 풍경은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기 마련이지만 그 때에는 이를 몰랐다. 기차 안에서 짧게나마 '이게 로마야?'라고 걱정했던 기억이 잠깐 켜졌다.

    첫 로마에 대한 여행기는 다른 글들에 비해 다소 소설적이 될 것 같다. 아주 솔직하게는 쓰지 못한다는 뜻이다. 로마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그 사람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써버린다면 기본적인 예의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마치 로마를 완전히 혼자 다닌 것처럼 이 글을 쓸 것이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떼르미니 광장의 풍경은 오는 도중 느꼈던 불안감을 흔적도 없이 지웠다. 그 때의 떼르미니 광장을 생각하면 늘 노란색이 떠오른다. 사진으로 보면 떼르미니 역과 광장에는 노란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지만 내 기억에는 그렇다. 햇볕이 노란색이었던 것 같다. 6월 중순에 내리쬐는 햇볕과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았다는 흥분이 현실과는 다른 기억을 만들어내었다. 떼르미니 역 근처에는 나와 같은 수많은 배낭여행객들이 그 노란 햇볕을 받으며 저마다 어떻게든 찾아낸 편한 자세를 취하고는 여행 가이드 책을 심각하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내 기억에 나는 우선 역 근처 인터넷 카페에 찾아 들어갔다. 도착을 알리는 이메일을 쓰기 위해서였다고 기억한다. 그 뒤에 어떻게 숙소로 이동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숙소는 한인 민박집이었다. 아무리 용감한 척을 했어도 첫 해외여행이라 두렵기는 했나보다. 첫 숙소는 한인 민박집으로 잡았으니 말이다. 아침과 저녁을 제공해주면서 당시 한국 돈으로 하루에 3만원 정도를 받는 저렴하고 친절한 민박집이었다. 보통 한인 민박집에서는 편안함은 느끼지만 여행과 관련된 중대한 경험을 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아침저녁으로 나오는 음식도 한식이고 숙박자들도 다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민박집에서 아주 중요한 경험을 했다. 그곳에서 와인을 처음 제대로 겪었기 때문이다.

    민박집 사장님은 와인을 좋아했다. 어쩌다 다 같이 모인 저녁 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사장님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딘가에서 와인을 한 병 꺼내오셨다. 지금이라면 등장한 와인 라벨부터 관찰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파악을 시작했겠지만 그 때에는 와인을 제대로 마셔 본 적도 없었고 관련 지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때였다. 당시 한국에는 와인이 소량만 들어왔고 품질과 관련 없이 상당히 비쌌다. 어쩌다 한두 잔을 받아서 마셔 본 적은 있지만 '이걸 왜 마시지?'하는 느낌이었다. 포도 주스에 알콜을 잘못 탄 것 같은 기분나쁘게 단 맛이었다. 그래서 민박집 사장님이 꺼내온 와인에 대해서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와인에 대한 안 좋았던 기억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올리며 사장님이 따라준 와인을 예의상 한 모금 마셨다.

    놀라운 맛이었다. 우선 달지가 않았다. 하지만 포도 맛은 났다. 술도 잘 섞인 느낌이었고 포도 껍질같은 느낌이 기분 좋게 까끌거렸다. 사장님은 신이 나서 그 와인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셨지만 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 해 주신 한 마디는 기억한다. '이런 맛이 취향에 맞으면 CHIANTI라고 적힌 와인을 사면 돼.' 이것이 나와 와인과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와인을 다시 찾아서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도무지 정확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남아있는 흐릿한 이미지로는 병이 상당이 어두운 색이었고, 문양이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CHIANTI'라는 단어를 알려줄 때 그 단어가 쓰여진 병의 일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병 밑바닥 부분에 가로로 'CHIANTI'라고 써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모든 기억은 확실하지가 않다. 요즘도 와인을 마시거나 살 일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이탈리아 와인 구역에 가서 한 번 슥 돌아본다. 하지만 '이거였다'싶은 와인은 찾지 못했다. '이건 꽤 비싼 와인'이라고 하셨던 것만이 정확히 기억이 난다.

    그 민박집에 대한 기억은 와인 이외에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이층 침대가 들어있던 공동 침실 구조 정도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어느 시점엔가 민박집에 묵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야경 투어를 했던 기억도 난다. 그 때에도 많은 수의 사람과 함께 하는 관광은 내 취향에 맞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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