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으면 좀 알려줘
6년 산 집에서 집주인에게 쫓겨났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난 집주인의 탈세를 돕고 있었다. 월세 연말정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세를 올리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5만 원이 올랐을 때 계약서 재작성을 요구했지만, 자신의 세금 문제를 좀 봐달라고 그래도 주변 시세보다 싸지 않냐고 그러기에 집 없는 서러움을 버티며 알았다 한 게 화근이었나? 이제 와서 불법으로 15만 원을 올릴 테니 연말정산도 하지 말아 달라는 집주인의 말에 여러 항의를 해보았고, 그 과정에서 이미 마음이 상했기에 이사를 간다고 통보해 버렸다. 까짓 거, 대출 당겨서 이사 가버리고 경정청구를 통해 5년간의 월세를 공제받아버린 뒤 곧 구 집주인이 될 자에게 세금을 안겨주려 한다. 화해의 뜻으로 사둔 농협 한우 선물 세트도 그냥 내가 다 먹어버렸다. 애초에 무산계급이 유산계급 걱정을 해주질 말았어야 했다. 계급 간 신의는 허상이었나 보다. 부동산 중개인은 사연을 듣더니 대체 이 년 전부터 왜 그 모든 수난을 견디며 신의로 살았냐고, 보기 드문 젊은이들이라고 탄식 반 칭찬 반을 섞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하루 만에 좋은 다세대 반전세 매물을 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부동산 중개인의 늦둥이 따님 입시 상담까지 해주었다. 다음 주부터는 온갖 서류를 들고 버팀목대출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내 처지가 이러함에도 자본주의적 사고가 안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재테크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2년간 나를 설득해 준 덕에 얼마 전 처음으로 S&P를 사보았다. 이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냥 그거라도 일단 사서 적금처럼 모으라는 조언을 드디어 수용한 결과이다. 내게는 '분하다. 열심히 재테크해서 재산을 불려 좋은 조건의 대출을 알아보고 괜찮은 입지의 자가를 얻어야지. 그러려면 해외주식에 관심을 갖고 장기투자를 하면서 단타를 어쩌고'하는 사고보다 '죽창 들어, 당장 혁명이다. 나는 동학 농민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자'라는 사고가 더 쉽고 빠르다. 재테크 서적과 자기 계발서, 부동산 투자서를 읽는 것보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는 게 더 재밌다. 실존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아님 뭐 대충 문학 작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일보다 주식 한 주를 매수하는 게 훨씬 어렵다. 이게 맞나? 최근 지도교수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 "결혼 정보 회사 직업 순위 98위가 북한 출신의 사람이래, 99위가 뭔 줄 아니? 인문학 박사야"라는 농담에 웃은 내가 싫다. 탈북민 혐오의 정서가 담긴 결정사의 순위와 인문학 박사의 자조적 농담이 섞이면 웃어야 하는 걸까 화가 나야 하는 걸까? 일단 나는 인문학 박사를 목표하고 있으니 울어야겠다.
다정을 목표로 삼는 나이지만 적어도 계약관계에 한해서는 냉정해야겠다는 교훈과 함께, 무산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였다. 언제까지 이어질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출 알아보러 다니고 포장이사를 예약할 때까진 이어지지 않을까 한다. 이제 나는 누구보다 냉정한 무산계급이 될 예정이다. 흥, 그간 냉정함은 유산계급의 전유물인 줄 알았지? 이제 나도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는 냉철한 무산자가 될 것이다. 비록 신분의 사다리를 뛰어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서남향의 쓰리룸 30평 이상의 자가를 위해 꿈이라도 꿔 보련다. 이미 꿈꾼다는 부분에서부터 냉정함 따윈 느껴지지도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