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물속 깊이 가라앉는 것 같았고, 주변이 웅웅거렸다. 소리가 들린 것인지 뇌가 울린 것인지 모르겠다. 방은 어두웠지만 머리는 하얗고 멍했다. 몹시 피곤했다. 몸이 무겁지 않은 날이 있었을까?
옆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필라테스 자격증을 따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건조한 답변이 돌아왔다.
“내년에 따면 되지. 연말이라 바빠서 그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12월은 연말이라 바쁘고 1월은 신입 교육으로, 2월은 신제품으로, 3월은 전시로 바쁘겠구나. 1년 내내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당장 시작해야 했다. 돈을 모으기까지,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면 2018년도 똑같이 지나갈 것이다.
다음 날 칼퇴하고 필라테스 센터로 달려갔다. 강사 자격증 수업을 등록했다. 너무 비싸서 카드와 계좌이체로 나누어 결재했다. 두 달 전, 새벽 퇴근길에 트럭이 내 차를 박았다. 뽑은 지 1년도 안 된 차는 반파되어 다시 나오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내 목과 허리는 종이인형처럼 낭창거렸다. 바빠서 병원도 못 가 억울했는데 그래도 그 합의금으로 미래의 나에게 투자할 수 있었다.
“그때 그 운전자가 너를 강사로 만들었네”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싶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이렇게 하루 15시간 책상 앞에 앉아있던 거북목 회사원의 필라테스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오후 6시 30분, 지하철역으로 분주하게 걸어가는 퇴근러들을 거침없이 추월해 교육 센터로 향했다. 첫 수업을 가는 길에 이미 나는 어깨 펴고 흉곽 닫고 발끝 포인으로 걷고 있었다. 들어갈 때와 달리 나올 때는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4시간 수업 중 알아들었던 것은 조사 정도였다. 뭐뭐가 뭐뭐한다는데, 뭐뭐를 모르겠다. 일단 받아 적었다. 실기 시간에도 느낌은 두 다리가 능지처참당하듯 찢어졌는데 거울에 비춰보니 넓게 봐도 90도였다. 멘탈도 몸도 너덜거렸다.
회사 평균 퇴근 시간 11시. 6시 30분 칼퇴 후 7시부터 12시까지 강사 수업을 듣고 실기 연습을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 야근하고 새벽에 퇴근하길 반복했다. 최소 4개월은 주말도 없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새벽에 죽지 않으려 졸음껌 n개씩 씹어가며 운전하나 싶어 눈물이 났다.
변화하고 싶은 것과 변화하는 것은 누워서 유튜브로 다이어트 영상을 보는 것과 실제로 물 한 모금까지 조절하며 바디프로필을 찍는 정도의 차이였다.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전자는 마음이 씁쓸했고, 후자는 힘에 부쳐 입 안이 씁쓸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멈춰 있는 상태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무리를 해야 기회가 열린다.
임경선, 자유로울 것
이 두 문장에 밑줄을 너무 많이 그어 종이가 너덜너덜했다. 나 같았다. 하긴, 매일 하던 대로 산다면 변화가 일어날 리 없다. 어떻게든 고여있던 내 인생에 터닝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무리했다. 이론 시험 실기 야근 이론 시험 실기 야근의 반복 끝에 다음해 2월 22일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드디어 다리도 180도로 쫙 찢어졌다.
어쩌다 보니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이 변화를 만든 건 고민이 아니라 결국 행동이었고 무리한 만큼 전진했다.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니-그것은 비록 시작에 불과했지만-전에 없던 새로운 선택지들이 생겼다. 일단 시작할 것.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출발하기. 인생의 키워드가 ‘일’이었던 참 직장인은 2022년 기자를 대하던 에티튜드로 회원들을 대하며 월, 화, 수, 목 오전만 일하고 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