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자작시는 자작자작 태우는 게 맛입니다-
아주 오래전
길을 걷다 우물 하나를 발견했다.
지쳐서 숨을 고를 때였다.
어디선가 아직은 아니라는 소리가 들렸다.
줄을 잡아당겼다
몸을 숙이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어둠
그 안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아직은 아니다는 말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가시에 찔린 듯 움찔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뭐라도 해야 했다
두 발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고개를 숙이는 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거였다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메아리소리를 들으며 걸어 나왔다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살다 어느 날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하늘은 이토록 높고 푸른데 마음은 왜 검고 어두운지 모르겠습니다.
제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몸집 크고 울 줄 모르는 괴물입니다. 가끔 답답하다며 소리를 지르는 날이면 글을 씁니다. 안에서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글을 씁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존재만은 확실합니다.
가끔 속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것도,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도 괴물의 농간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뭐라도 된 마냥 걷습니다.
구름은 시시 때때 모양을 바꾸고 바람은 제 마음대로 불었다 말았다 하는데, 그 모든 것에 의미를 찾느라 정작 제 마음은 팽개쳐 놓았습니다. 섭섭해서 등을 두들기는 날이면 하루종일 슬퍼서 꺼이꺼이 울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