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오늘의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195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오사카 부림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해 마침내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85년 <방과 후>가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1999년 <비밀>로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을, 2006년에는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제3탄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제134회 나오키상과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했다. 2012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중앙공론 문예상을, 2013년 <몽환화>로 시바타 렌자부로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작가소개란이 화려하다. 그 모든 소개를 떠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재미있다. 일단 믿고 본다. 그는 다작을 하는 작가로 유명한데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집필해서 작품을 내놓는다. 그래서인지 가끔 식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여전히 그는 이름만 들어도 손이 가는 작가님에 틀림없다.
<그 시절 우리는 바보였습니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어린 시절을 담은 에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이지만 정작 어린 시절 그는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불러서 만화책이라도 읽게 하라고 했을까. 그 말을 들은 어머니의 대답도 인상적이다. 우리 아이는 만화책도 안 읽어요.
만화책도 안 읽던 아이가 고1 때 누나가 읽던 추리소설을 읽고 난 뒤 소설의 재미에 빠진다. 책을 읽다 자신이 직접 소설을 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오랜만에 책을 접하고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갑자기 의욕이 발동했는지, 아니면 귀신이 씌었는지, 하여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놀랍게도 끝까지 다 읽었다. 별로 긴 얘기가 아니었지만 거의 일주일에 걸쳐 읽었고, 마지막에는 스토리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완주한 것이다. 그때까지 아무리 재미있다는 책도 한 두 줄 읽고 포기했던 일을 생각하면 일대 사건이었다. 추리 소설이라는 거 꽤 괜찮네. P.163
신문을 받으면 제일 먼저 TV편성표를 확인한다. 요일마다 다른 만화가 상영됐는데, 재방송도 없어서 본방사수는 필수였다. 만화가 시작하기 전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앉아 있으면 꼭 엄마는 심부름을 시켰다. 네가 가라. 엄마가 언니 이름 불렀잖아. 에이하고 일어나 갔다 오는 사이 오프닝노래가 끝나 있었다.
일요일아침에만 볼 수 있는 만화들도 있었다. 호호아줌마, 빨간 머리 앤, 소공녀 세라, 고바리안, 메칸더 V, 마루치아라치, 모래요정 바람돌이, 개구리 왕눈이, 독수리 오 형제, 달려라 하니, 영심이, 들장미소녀 캔디, 베르사유의 장미, 은하철도 999, 시간탐험대 등등 제목을 떠올리면 전주가 들리고 아직도 선명하게 부를 수 있는 주제가들.
<그 시절 우리는 바보였습니다>는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책을 읽지 않은 대신 만화를 많이 봤다. 고질라와 울트라 V와 울트라 세븐들을 나열하며 열광하는 아이들을 그려내는 작가의 글은 진지하게 느껴졌다. "검정고무신"이란 만화가 떠올랐다. 시대와 공간이 달라서 이질적인 면이 조금 있었지만, 만화를 보고 노트에 인물들을 그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부분이 있었다.
24편의 에피소드 안에는 이런 걸 써도 되나? 싶을 만큼 현재 정서와 맞지 않는 내용도 들어 있다. 불량학생과 일반학생이 반반이었던 중3 교실에서 일어났던 믿기 힘든 이야기들, 학교에서 마작을 하거나 여학생탈의실을 엿보는 남학생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음, 그래 이런 시절이 있었지.라고 공감하기보다는 진짜 이랬다고? 이런 일이 생겨도 어른들은 뭘 했던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일들이 당연시되고, 거짓 강함에 고개를 숙여야 시절에 보통 사람이 제정신을 갖고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런 환경 속에서 크게 엇나가지 않고 잘 살았네 감탄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진다. 중요한 건 글이 너무 재미있다는 거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따뜻한 눈으로 지켜본다.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고 맴도는 사람들, 마음을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알아본다. 사람을 직업이나 사는 곳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입체적이다. 추리소설이지만, 잔인하지 않고, 사람사는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재미와 감동이 있고 짜릿한 반전이 있는 소설을 쓴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는 이유다.
<그 시절 우리는 바보였습니다>를 읽다 보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개구장이 어린시절의 작가를 보는 재미가 있다. 아버지와 함께 괴수영화를 보고, 어머니는 책을 안 읽는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들었지만 아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기억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았지만,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하는 따뜻한 집안에서 잘 자란 느낌이었다. 이름만 대면 사람들이 기겁하는 불량스러운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중학 시절을 현명하게 보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믿어주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린 시절 괴수영화를 보며 스토리의 힘을 알고, 학창 시절 만났던 부조리한 사회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동안 생각의 힘이 커졌다. 그렇게 응축되고 있었던 무언가가 한 권의 추리소설로 인해 터지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
살면서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의 유형이 소설 속에서 그대로 살아 있는 인물이 된다. 고등학교 때는 육상부에서 대학 때는 양궁부에서 모진 훈련을 견디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강한 힘이 생긴다. 글을 쓰기 위해 강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에 충실하다 보니 저절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 힘이 어쩌면 작가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작품을 쓸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모두 바보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척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자신의 실수에는 관대하고 지나간 일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각색한다. 말하는 건 쉽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 뭔가 그럴듯한 핑계를 만드는데 시간을 허비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척하다 보니 가끔 마음이 뒤틀리고 얼굴이 빨개진다.
그래서 이 책이 끌렸던 것 같다. 자신이 바보였던 시절을 당당히 말해주는 책. 우리가 바보였던 그 시절이 모여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사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들려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그때 그 시절 이야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만약 난 히가시노 게이고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 없어. 책도 읽어본 적 없는 걸. 하면 읽지 않는 게 좋다. 생각보다 재미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족 : 혹시나 이 글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저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용의자 X의 헌신>, <유성의 인연>을 추천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