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키가 크고 얼굴이 까만 남자였다. 서울에 갈 때마다 공항에 마중 나왔던 그는 운전하는 내내 말 한마디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나눈 후 줄곧 나에게 존댓말을 썼다.
엄마와 나는 서울에 가끔 올라갔고, 그때마다 그의 집에 머물렀다. 그가 데리고 간 식당에서 처음 '갈매기살'을 먹었는데, 서울 사람들은 갈매기를 구워 먹는 것에 놀라서 먹지 않았다. 그는 멀뚱히 앉아 있는 내 앞에 고기를 놓으며 한번 먹어보라고 권했다. 마지못해 먹었는데 고기가 맛있어서 두 번 놀랐다. 그렇지만 도저히 갈매기를 먹을 순 없다고 했더니 그는 껄껄 웃으며 그 갈매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엄마와 내가 살갑게 굴어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제 할 일만 했다. 종달새같이 작고 예쁜 막내 이모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모 말만 들었다. 이모부라고 부르면 네.라고 대답했다. 조카인데 말 놓으세요.라고 하면 네. 대답했다. 이모부가 말을 안 놓으니까 이상해요.라고 웃으며 말했더니 나중에요.라고 말했다.
이모는 이모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한다고 투덜댔다. 한시라도 떨어지면 큰 일어날 것처럼 군다며 에구 내 팔자야. 소리를 자주 했다. 크고 멋진 남자가 작고 예쁜 이모 옆에 있는 게 부러워서 이모부 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모는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모는 매일 못 산다 못 산다 하면서 아들, 딸 낳아 시집, 장가보냈다. 음식솜씨가 좋은 이모는 이모부가 밖에서 먹는 밥을 싫어한다며 삼시세끼 밥 차리는 것도 일이다. 일이야. 중얼거렸다. 얼마 전 이모부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기 관리 잘하던 사람이었는데 충격이 큰 가봐. 어쩌겠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지. 먹는 것도 신경 쓰고, 운동도 열심히 해. 이모도 너무 고생이다. 내가 뭐 하는 거 있어. 저 사람이 고생이지. 밉다가도 아픈 거 보면 마음이 짠해. 이모도 밥 잘 챙겨 먹어. 그래, 그래. 너도 밥 잘 먹고. 제주 김서방은 잘 있지? 그럼, 잘 있으니까 이모가 고생해. 그래. 나중에 이모부 좋아지면 제주도 내려갈게. 그때 보자. 종종 전화하고. 네. 잘 지내. 네. 들어가세요.
어제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나.
그러고 보니 요즘 목소리를 통 못 들었다. 그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막상 일이 생기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이모 고생 안 하겠구나. 다행이다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좋아하던 이모랑 헤어지고 우리 이모부 가시는 길에 발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싶어 가슴이 짠했다.
나중에 만나면 편하게 이름 불러주기로 했는데, 끝내 이모부는 내 이름을 불러보지 못하고 그렇게 가셨다. 나중에 이모랑 같이 제주도 오면 맛난 거 먹기로 했는데. 나중에 이모부랑 아빠랑 낚시 가기로 했는데.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들.
늙는 것.
아픈 것.
죽는 것.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나이가 들었다고 느끼면 슬프고 서럽다. 예전과는 다르게 말을 듣지 않는 몸뚱아리는 서글프다. 가까운 이의 죽음은 몇 번을 겪어도 낯설고 두렵다.
누구나 늙고, 아프고, 죽는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생노병사의 과정일 뿐이다. 나에게만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어디에도 없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삶.
시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당장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처럼 살 수 있을가? 후회와 번뇌의 고리를 끊고, 만족과 충만으로 가득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느 날 문득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어리둥절하며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나중에'라는 말은 없다.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위해 당장 해야 할 일을 한다.
나중에 만나자
나중에 해야지
나중에 해줄게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언제?
나중으로 미룬 일을 아무것도 못 하고 이모부가 가셨다. 이제 이모부는 조카에게 존댓말 썼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중이라는 말이 이토록 아프고 슬픈 단어였는지 미리 알았다면 한 번쯤은 서울에 가서 얼굴 봤을 텐데. 언젠가는 할 거라는 말로 나중에를 감추는 동안 중요한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