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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by 레마누



오래전에 우리 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할머니네 집과 우리 집이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그걸 안거리와 밖거리라 부른다. 나는 엄마에게 혼나거나 동생들하고 싸우면 밖거리에 있는 할머니 방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소문난 멋쟁이였다. 두 살 연상의 할머니가 먼저 좋아했다고 옆집 할머니가 말해줬다. 집에 있을 때도 깔끔한 옷을 입고, 매일 면도하는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툭툭 던지는 말이 좋았다.


할머니는 말없는 할아버지를 종일 혼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욕을 할 때마다 내게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조금만 참으면 돼. 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곤 했다. 할머니가 제 풀에 지쳐 방을 나가면, 할아버지는 용각산의 하얀 가루를 한 입에 털어놓고 옆에 앉아 말했다.


-무사 울엄시니. 고라보라.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으면 싸한 박하향이 나는 할아버지의 까맣고 동그란 눈이 보였다.

-엄마가 나만 미워해

-동생이 내 말을 안 들어.

-엄마가 차비를 안 줘.


할아버지한테 실컷 말하고 나면 할아버지는 알사탕을 쥐어주거나 백 원짜리 동전을 건넸다. 나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할아버지에게 소도리를 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시원했다. 할아버지가 '고라보라'라고 하면 뭐든 말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내 편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에 꿈을 꿨다. 할아버지가 큰 버스에 올라타는 꿈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부르며 나도 따라 버스에 올라타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손을 내저으며 너는 타지 말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장례식에 왔던 친척분이 상복을 입고 심부름을 하는 나를 보더니 대뜸 "남자친구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해 놓고 얼마 안 있어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친척분의 소개로 만난 남자와 결혼했다. 남자는 할아버지처럼 말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 툭툭 내뱉는 말이 재미있었다.


결혼하고 시댁문제로 속이 상할 때마다 남자는 자기에게 다 골라고 했다. 들어줄테니 다 말하라고 해서 말을 하다 보면 억울한 것도 섭섭한 것도 풀렸다. 지금도 무슨 일만 생기면 남편을 붙잡고 소도리를 하는 건 그때문이다. 말하고 나면 말하는 것만으로 속이 시원할 때가 있다. 나는 소도리쟁이다.




*고라보라 : 말해봐. 의 제주도 사투리입니다.

*소도리 : 고자질, 의 제주도 사투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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