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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빛나는 사람

by 레마누 Mar 25. 2025
3월 23일 일요일 오전 7시~8시 건율원 라이브 스트리밍에 참석 후 강의 내용과 개인적인 의견, 더불어 공부한 내용을 적은 글입니다.   


일요일 아침 7시 지담작가님의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 시간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질문을 생각했다. 강의를 듣다 보니 질문에 대한 답이 절로 나왔다. 내가 생각했던 질문은 1. 하고 싶은 것이 넘칠 때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2.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서 조금만 힘들어도 그만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게 버릇이 됐습니다. 자꾸 도망가는 내가 싫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들의 질문을 보고, 지담작가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모든 답은 내 안에 있었다.


체면이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한 걸까요?


체면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부정적이지만, 모든 단어는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다. 체면이라는 단어가 체면(體面)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체면이란 그때그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단어 자체엔, 부정적과 긍정적 의미 둘 다 담겨 있다. 누군가에 의해 규정된 단어를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더더군다나.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요?


자연, 우주, 세상은 다 같은 말이다. 자연은 自然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달래는 달래 같고, 쑥은 쑥 같아야 한다. 장미가 아름답다고 달래가 장미꽃을 피우려 하지 않는다. 인간도 인간다워야 한다. 그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조화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뭔가를 끊임없이 욕망하고 바라고 그것을 위해 변화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꿈을 꾸지 않으면 살아있는 시체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래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조화다.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나의 얼굴에 맞게 살아가는 것. 나만의 창조성을 만들어가는 것. 나를 내려놓고, 내 꿈을 위해 나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내가 쓰고 싶은 글과 남들이 나에게 원하는 글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남들이 원하는 글이다. 나의 가치를 높여라. 내 글의 가치를 높여라. 쓰고 싶은 글과 원하는 글 둘 다 써라. 내가 가진 것을 스스로 가치 있다 생각하고 믿는다. 내가 내 가치를 만들면 남들은 절로 그 가치를 알고 찾아온다. 


원하는 삶과 지금 살고 있는 삶의 괴리감이 있습니다.



삶이 원래 그렇다. 미끄럼틀을 타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스키나 썰매도 마찬가지다. 힘들게 올라가서 한 번에 쓱 하고 내려온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어떤가. 재료를 사서, 손질하고, 요리하고 상을 차리는 시간에 비해 먹는 것은 금방 끝난다. 그리고 설거지거리가 쌓인다. 애쓰게 애쓰게 올라가서 한꺼번에 내려오는 것이 삶이다. 쉽게 얻어지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정신적 쾌락에 이르는 길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다.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엄마의 유산에 필요한 일을 한다. 성공하면 좋겠지만, 실패해도 일 속에서 배울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냥 하면 된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 아는 것들을 해 나가다 보면 무슨 일이든 생길 것이다. 내가 하려는 내 일을 내려놨을 때 정적인 정신적 쾌락에 머문다.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실패하면 하나가 제쳐진다. 그럼 나만의 데이터가 생긴다. 나의 데이터는 내가 만든다. 해 보고 안 되면 다음에 안 해도 되니 땡큐다. 하다 보니 됐으면 그것 또한 땡큐다.


인간의 본능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다.


자기가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 바보니까 피해라.

자기가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단순하니까 가르쳐 주어라.

알면서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자고 있으니 깨우라.

알면서 안다는 사실도 아는 사람, 현명한 사람이니 따르라. (아라비아 속담)



정신의 나체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피해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모르는 데 모르는 걸 모르고 소신만 있는 사람을 피해라.


합일과 일체


우리는 어딘가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관계이다. 내가 소유하고 소유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의 우주다. 내 안에 거대한 우주가 있다. 나는 거대한 자연이고, 세상이다. 나라는 우주가 품어내는 열기가 글로 나온다. 나는 내 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면 된다. 내가 쓰는 글에 어울리는 삶을 살면 된다.



나로서 빛을 내는 사람,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 나로서 빛나는 사람. 그것이 창조고 창의다. 창의는 곧 내추럴이다. 티베트에서는 창의라는 단어가 없다. 대신 창의라는 단어를 쓸 자리에 내추럴이라는 단어를 집어넣는다. 가장 자연스러울 때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된다.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숨을 죽이며 몰입하는 시간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강의가 끝나는 것도 몰랐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집중했다. 이상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알을 깨고 싶다고 말을 하면서도, 알이 깨질까 걱정하며 살았다. 껍질을 단단하게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눈과 귀를 가리고는 아무것도 안 보여. 너무 깜깜해. 무서워. 누가 날 좀 깨네 주세요. 소리치며 살았다. 



고개만 들면 되는 것을 껍질을 깨기 위해선 몸을 펴고 힘을 줘야 하는데, 잔뜩 웅크린 채 살아오느라 힘이 없고, 나약했다. 넘어지면 아플까 걷지 않았다. 말하면 상처 입을까 입을 닫고 살았다. 누가 나보다 더 강력한 사람이 있어 이런 나를 꺼내주기만 기다렸다. 



"엄마의 유산"에 합류하고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러면서 꿈만 꾸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고 싶은 것은 있지만, 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옆에서 뭐라 해도 내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이제 조금씩 깨닫는다.

  

자각하고 즉시 한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변화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 힘을 이겨낸 사람만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 변화는 말로 오지 않는다. 변화는 몸으로 온다. 죽을힘을 다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겨우 한 발짝 움직인다. 



일단 움직이기만 하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가속도가 붙고, 무섭게 움직인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그 한 발짝이 어렵다. 지금 나는 끄덕하지 않는 나를 밀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온몸이 저항하고 있다. 


그만하라고. 힘들어 죽겠다고. 나랑 같이 누워서 넥플리스를 보자고, 날도 좋은데 꽃구경이나 가자고. 자꾸 조른다. 몸은 힘든 걸 싫어하고, 머리는 자꾸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고 야단이니 하루하루가 시끄럽다. 그 안에 또 다른 나는 글을 쓴다. 육체와 정신이 싸우는 것을 보며, 오늘은 누구 편을 들지 고민한다. 기준은 뭘 했을 때 기분 좋게 잠잘 수 있느냐다. 하루의 느낌표가 몇 개인지 세는 재미가 쏠쏠한 요즘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는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이든 반딧불이든 뭐든 좋다. 자체발광하고 싶다. 누군가가 비춰주는 빛을 따라 걷는 건 이제 그만하련다.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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