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엔드게임 이후의 마블 영화는 내게 특별한 감상이나 기대를 남겨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블랙팬서 역시 어떠한 기대보다는 걱정을 안고 예매했다. 주연 배우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더욱 혼란스러웠을 이 영화를, 나는 고요히 응시했다.
트찰라의 죽음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긴박한 분위기 속 슈리는 평소 믿지 않던 신을 찾으며 제 오빠를 살려 달라 청한다. 그러면 당신의 존재를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노라고.
블랙팬서 1을 보면 슈리는 소위 말하는 '요즘 아이'이다. 전통과 신을 믿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치와 과학을 믿는 유능하고 젊은 과학자. 블랙팬서의 조력자이자 그의 사랑스러운 동생.
끝내 들이닥친 트찰라의 죽음 앞에 모두는 휘청인다. 와칸다는 왕을 잃었고, 수호자인 블랙팬서를 잃었다. 외부에서는 지금이 적기라고 여기며 그들을 압박하려 한다. 와칸다에만 존재하는 비브라늄을 전 세계에 나눠달라 종용하며 뒤에서는 용병들을 고용해 기습하기도 한다.
허나 와칸다는 언제나 그러하였듯 견고하다. 비단 트찰라만이 와칸다의 모든 것은 아니었기에. 영화는 오랜 러닝타임 동안 공을 들여 설명한다. 사랑하는 이, 가족, 왕이자 수호자를 잃은 이들의 삶을 적당한 온도로 감싼다. 그들의 뜻 모를 분노와 갈 곳을 잃은 우울을 자극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네이머라는 새로운 인물은 빌런의 역할을 띄고는 있지만 본질을 찾아보면 사상이 대립되는 인물일 뿐이다. 블랙팬서 1의 킬몽거처럼. 조금 더 급진적이고 호전적인. 이 부분은 백인이 오랜 시간 흑인을 착취했던 역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는 네이머와 킬몽거를 그저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기 어렵다. 그들이 어떤 역사를 거쳐 그런 마음을 쥐게 되었는지 알기에.
영화 속에서 슈리는 아픔과 고통으로 이루어진다.
세상을 불태워 버리고 싶단 분노는 해소되지 못한 채 슈리의 안에 들끓는다. 천진하게 왕을 응원하고 첨단 기술을 연구하던 공주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왜'와 '어떻게'를 섬세히 표현한다. 영화 속 사람들뿐만 아니라 관객들 역시 트찰라를 잃었다. 그 아픔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의 존재를 지우지 않으면서 새로운 블랙팬서의 탄생을 납득할 수 있게 그려낸다.
슈리는 트찰라와 은자다카(킬몽거)사이에 존재하지만 그들과 다른 독보적인 블랙팬서다. 슈리를 이루는 조상과 가족들의 부분 부분은 그녀의 안에 존재하지만 그는 대체되는 블랙팬서가 아니다. 슬픔의 어귀마다 슈리는 성장하고 깨닫는다. 상실과 복수를 딛고 일어서고야 마는 슈리만의 블랙팬서이다.
나는 창작자가 제 작품을 사랑하고 아끼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작품을 보면 나도 도리없이 작중 인물들을 애정하게 된다. 블랙 팬서를 보다 보면 다른 여타 조건들을 모두 배제하고, 감독이 온전하게 캐릭터들을 사랑하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감정과 능력을 선연하게 표현한다.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켜켜이 쌓인 슬픔과 상실이 가득하지만 희망 역시 존재한다. 와칸다의 해가 결코 지지 않을 것임을, 영원할 거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나는 이 영화 속 수많은 인물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연대를 사랑하고, 치기 어린 복수심까지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