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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May 01. 2024

최욱경

왜 천재화가는 요절하는 사람이 많을까?





최욱경, 학동마을,  Acrylic on Canvas, 1984




타오르는 불꽃처럼 온몸을 불사르다 4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여류화가 최욱경을 생각할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천재화가는 요절하는 사람이 많을까?

왜 천재화가는 살아생전에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많을까?

서양에서는 고흐(37), 에곤 쉴레(28), 정신병과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툴루즈 로트렉(37), 모딜리아니(36), 그라피티(낙서 그림)를 예술로 승화시킨 장 미셀 바스키아(28), 영국의 여류 화가 베시 맥니콜(35)등이 그랬고, 우리나라에서는 이중섭(40), 이인성(38), 손상기(39), 구본웅(47) 등이 그렇다.  


최욱경,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대표 화가,

미국과 한국에서 교수를 하며 후배 양성에 매진했고,

시를 좋아하고 시집을 출간할 정도로 문학적 감성이 풍부했던 최욱경.


출판업을 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최욱경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부모는 그녀의 재능을 길러 주기 위해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김기창과 박래현의 부부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게 할 정도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최욱경, 어린이의 천국,  Acrylic on Canvas, 1977





운이 좋게도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김흥수와 장운상, 정창섭, 김창렬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재학 중에는 한국미술협회 공모전에서 ‘정물’로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두 여인의 나부상을 출품하여 입선을 하는 등 일찍이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대학원 재학 중 196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시간 주에 있는 크랜부룩 미술 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학교는 오로지 대학원 프로그램만 운영하는 학교로 미국에서도 인정하는 명문 학교이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뉴욕과 메인(Maine) 주에 있는 아트스쿨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조)교수생활을 하기도 했고, 아실 고르키, 윌렘 데 쿠닝, 마크 로스코 등의 추상표현주의를 수용하여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으며,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작품과 한국의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부드러운 곡선과 색채를 사용하는 독자적 색채 추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최욱경, 풍경, Acrylic on Canvas, 1984





그녀는 ‘나의 이름은’이라는 시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주 먼 옛날,

한때에

나의 이름은

마루 위에 손 그림자와 놀던

겁 많게 눈 큰 아이였답니다.

한때에 나의 이름은

낯선 얼굴들 중에서

말을 잃어버린 벙어리 아이였습니다.

타향에서 이별이 가져다주는

기약 없는 해후의

슬픔을 맛본 채

성난 짐승의 동물원에서

무지개 꿈 좇다가

길 잃은 아이였습니다.

결국은 생활이라는 굴레에서

아주 조그마한 채

이름마저 잃어버린 이름 없는 아이랍니다.

나의 이름은 이름 없는 아이랍니다.


그녀의 시를 살펴보면,

미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결코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언어와 문화가 낯선 미국 생활은 ‘뿌리가 흔들리는 충격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멸시, 언어소통에서 오는 불편함, 아무리 발버둥 쳐도 뛰어넘을 수 없는 예술가로서의 한계, 설상가상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아픈 경험, 이러한 상황들이 수렁으로 깊게 빠져드는 것처럼 삶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미국을 왕래하며 작품 생활을 하던 최욱경은 1979년 영구 귀국하여 영남대를 거쳐 덕성여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이 시기는 국내 여행을 다니면서 자연의 이미지를 시각화하여 강렬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터치와 리듬감을 주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하였다.





최욱경, 풀밭 위의 점심식사,  Acrylic on Canvas, 104 X 139cm , 1975




그녀의 작업실에는

"일어나라! 좀 더 너를 불태워라"

라는 좌우명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좌우명처럼 자신을 불태우며 불꽃처럼 살았다.

작은 키에 연약한 몸으로 1000여 점의 숱한 작품들을 완성시켰고, 맨발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500호를 비롯한 대작을 제작한 것을 보면 불 같은 힘이 아니라 화산 같은 열정을 쏟아부었던 것 같다.


그녀는 몇 번의 개인전을 가졌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날개를 달고 훨훨 날고 싶었던 그녀에게 비평가나 일반인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목 졸림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괴로웠을 것이다.

독신으로 사는 그녀가 술과 담배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것은 외로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실망감과 좌절감을 떨구어 내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을까?


1985년 여름 어느 날, 그녀는 음주 후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두 눈을 감은 채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나이 45세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작품들은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호암 미술관, 갤러리현대, 국제갤러리, 가나아트 갤러리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추모전과 회고전, 유작전이 계속 이어졌고, 지방의 미술관이나 갤러리들도 가세했다.

2021년과 2022년에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퐁피두 미술관에서 그녀의 추상작품 3점이 전시되었고, 이어서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었다.

최욱경의 작품은 경매에서도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2021년에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는 작품이 1억 4500만 원에, 2024년 3월에는 케이옥션 경매에서 1억 700만 원에 풍경이란 작품이 낙찰되었다.


어느 날 홀연히 한 마리 새가 되어 멀리 날아가 버린 최욱경,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잃었던 길을 찾고,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아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리라.





최욱경, 무제, Acrylic on Canvas,  65.1 x 53cm,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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