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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Mar 19. 2024

#1 커피를 마시는 것에 대하여

지금 나는 선릉에 새로 생긴 카페에 앉아서 오늘의 첫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아늑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층고가 높고 테이블 공간이 널찍해서 글을 쓰기에 좋다. 커피도 꽤 맛있고 가격도 저렴하다. 집 앞이라 앞으로도 자주 올 것 같다.


요즘 나는 내가 무엇을 사랑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데, 지난 15년 간 변함없이 사랑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커피를 마시는 일인 것 같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 아팠던 적 없이 기분좋은 날에는 활력과 설렘이, 울적한 날에는 위안이 되어준다니, 얼마나 말도 안되게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커피가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내가 처음 커피를 마신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이었다. 처음 편의점에서 커피를 살 때, 커피를 구입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그 때까지 나는 커피는 어른들만 마시는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고, 어린 시절 내내 커피를 마시는 것을 너무나도 동경해왔던지라 이렇게도 손쉽게 첫 커피를 마셔버린다는 것에 대해서 놀랍고도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 나는, 어린아이들에게는 금지되어있는 커피의 매혹적인 향을 맡으며, 세련된 어른이 되어서 당당하게 마시기를 꿈꿨달까. 나는 커피 마시는 것을 어찌나 동경했던지, 12살 쯤인가 아빠가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는 내게 ‘그렇게 향이 좋으면 한 입 마셔봐라’하고 종이컵을 내밀었을 때 어른이 되어 마시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편의점에서 처음 커피를 사 마셨을 때, 커피는 달착지근했고 커피향 그대로의 맛이 났고 나는 여전히 촌스러운 어린애같았고 생각했던 것만큼의 낭만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커피는 정말 맛있었고 그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를 사 마시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은 중학교 3년이 내내 그러했듯 울적했지만 그래도 지옥같았던 학교에서 해방되었고 미래는 불투명했지만 더 이상 나는 인생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17살이었지만 행복했던 시절은 여전히 그리 멀지 않은 과거처럼 느껴졌고 행복했던 시절로부터 벌써 3~4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어쩌다 내가 모든 사랑과 따스함과 즐거움과 편안함으로부터 그리도 순식간에 내쳐졌는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중학교 3년 내내, 그것이 내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얼떨떨해하는 중에도 점점 더 과거의 빛나고 따스했던 시절에서 멀어져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중학교 3학년 겨울 즈음에는 이제는 어쩌면 너무 멀어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얼떨떨했지만, 아마도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그러니까 내가 영원히 그 시절로부터 추방당한 것은 아무래도 내가 공부를 못해서, 내가 주변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어서, 내가 성격이 안 좋고 화를 많이 내서 그런 것 같다는 슬픈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 무렵 이사 온 집은 차갑고 외로웠고 나는 새로운 동네에서 집 주변 도서관이라는 요새를 찾아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들고 허름한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서 수학문제집을 펼쳐놓고 느릿느릿 문제를 풀면서, 달콤한 커피를 빨아마셨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 내 성적은 처참한 수준이었고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싶긴 했다. 초등학교 때는 그토록 영특하던 나였고 중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1100점 만점의 11과목 필기시험에서 1098점을 받아 큰 주목을 받은 나였다. 성적이 점점 떨어지더니 중학교 2학년 때 전교 14등을 해서 엄마아빠한테 크게 혼나고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고, 돌아와보니 나는 평균 70점의 성적을 받고 어느새 ‘공부 못하는 애’가 되어있었다.

그 과정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내가 공부 못하는 애라는 게 별로 의아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엄마아빠도 어느새 내가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를 보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지금 돌아보니까 내가 공부를 못하게 되었던 것은 수학의 탓이 컸다. 수학은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중학교 1학년 때 나오는 ‘소금물 옮기기’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시작했는데, 해당 학년 공부만 해도 모자랄 판에 선행학습을 하기 시작하면서 머리가 완전히 꼬여버렸던 것 같다. 그때는 내가 수학머리가 없어서 수학을 못 하는 줄 몰랐고 내가 무언가 문제가 있어서, 내가 더 집중하지 않아서, 혹은 사춘기라서 반항하느라고 못 하는 줄 알았다. 물론 그런 이유들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당시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듯) 내가 공부를 잘 못하고 싶어서 못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좀 더 집중하려고 노력할수록 점점 더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수학 뿐 아니라 다른 과목들도 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 머리가 고장나서 멈춰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이전까지는 쉬웠던 것들조차도 머리에 집어넣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돌아와보니 나는 수학 뿐 아니라 다른 과목들도 모두,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단순암기도 할 수 없었고 그냥 공부가 지긋지긋하고 싫기만 했다. 중학교 마지막 시험에서 50점대 과목도 몇 개 있었고 한 과목은 30점이었던 게 기억이 난다(일본어였다).

외고진학을 이야기했던 것은 정말이지 먼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공부 못하는 아이였고 내 미래는 아주아주 막막하게 보였다.


그런 내가 중학교 3학년 겨울에 매일같이 도서관에 갔던 것은 마음잡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너무 외로워서였다.

집에서 나는 너무 외로웠고 마음 터놓을 친구도 한 명 없었고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모든 것들을 다 망쳐버렸다는 우울함과, 나의 잘못으로 인해서 따뜻했던 세계에서 추방당했다는 외로움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 우울함을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내가 모든 것을 망쳐놓은 주제에 위로해달라고 할 자격도 없었고 나를 위로해줄 사람도 없었다.

허름한 동네 도서관에 매일같이 가서 고1 쎈수학문제집을 펼쳐놓고 달콤한 편의점 커피를 빨아마시면서 한 문제씩 느릿느릿 풀면서 나는 외로움과 자책감을 달랬다. 그리고 그 달콤한 커피의 맛은 나의 외로운 마음에 위안이 되어주었다.


커피를 마셨다고 하면 엄마아빠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엄마아빠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맛있냐고 물어볼 뿐이었고 일말의 죄의식마저도 깨끗이 씻어낸 나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매일같이 커피를 하나씩 사마셨다.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는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었고 나 자신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친구들은 나에게 매우 호의적이었고 나도 순식간에 고등학교가 좋아졌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눈치없이 쉬는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반의 소위 ‘노는’ 아이가 ‘너 설마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니?’라고 큰 소리로 비웃었던 적이 있다. 그때 이후로 다시는 그렇게 나대지 않으려고 조심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같이 하교하는 친구가 나에게 ‘집에 가는 길에 우리 같이 영어단어 외우면서 갈래?’라고 했었다. 그때 받았던 문화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당당하게 제안하는 그 친구가 너무 멋있어보였다. 그리고 그 친구 뿐만 아니라 1학년 때 반 모든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였고 공부잘하는 애를 꼽(?)주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는 분위기였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정말 운좋게 좋은 반 친구들을 만났던 것 같다. 학급분위기도 좋았고, 그때 반 친구들 모두 순진하고 착한 모범생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너무 경쟁적이지도 않았고 재미없지도 않았고, 다들 참 착하고 유쾌했다.

어쨌든 고등학생이 되어서 만난 반 친구들이 정말 좋았고, 친구들과 순식간에 친해지면서 나도 그 친구들처럼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었고 공부에 대해서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싶어졌다. 나는 중학교 시절의 우울함을 벗고 다시 유쾌해졌고 친구들을 따라서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대단히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열심히 했다.

처음에는 내가 (수학은 당연하고) 영어같은 과목에서도 관계대명사가 뭔지도 모르고 기본적인 영어문법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친구들이 웃으면서 알려주곤 했다. 첫 중간고사에서 국어, 수학, 한국사는 3등급, 과학은 4등급을 받고 그나마 영어에서 2등급을 받았다.


엄마는 여전히 탐탁치않아했고(내 성적도, 공부를 하는 태도도) 나를 불러앉혀놓고 ‘엄마는 너가 연고대는 가길 바랬지만 지금은 연고대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X대학은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 당시에 학교에서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엄마의 냉담한 태도에 크게 영향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학기 기말고사에서 일이 터졌다.

그 당시에 국어선생님들이 갑자기 요상한 수행평가 시험을 하나 본다고 했는데, 책 2권을 읽고 그 책에 나온 내용들로 문제를 푸는 시험을 본다고 했다. 기억하기로는, 교육청에서 국어 수행평가 비중을 30%인가로 늘리라고 했었고, 그래서 그 시험이 30% 비중에 달하게 되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합쳐서 70%이니까 그 수행평가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들 기말고사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그 수행평가는 요식적 시험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그 때 선생님들도, 쉽게 낼테니 대충 읽으라고 하셨다) 다들 빠르게 한번씩 책을 읽고 시험을 봤다.

그런데 국어선생님들이 난이도조절을 잘못 하는 바람에 시험문제가 엄청나게 어려웠고, 별 생각없이 한번씩 빠르게 책을 읽고 시험에 응한 아이들은 다들 우수수 틀렸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도 6~10문제 정도씩 틀렸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나는 겨우 2문제를 틀렸다. 알고보니 수행평가 시험 한문제가 기말고사 세문제에 해당하는 배점이었고 나는 순식간에 중간고사 성적을 만회했다. 오히려 기말고사는 몹시 쉬웠고, 결국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국어 1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수학시험은 더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중간고사 3등급에서 1등급으로 올랐다. 수학선생님들도 난이도조절에 실패해서 말도 안되게 어렵게 기말고사가 출제되었고, 공부를 잘하는 이과애들조차도 엄청나게 틀렸는데(이 친구들은 나중에 다들 의대에 갔다), 그 시험을 내가 반에서 가장 잘 봤다. 내가 잘 본 이유는 간단한데, 제일 어려운 4~5문제를 그냥 찍었는데 찍은 게 우연히 다 맞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한국사 시험이며 영어시험에서도 찍은 문제들이 맞거나, 내가 공부했던 것들만 시험에 나오더니 결국 나는 거의 대부분의 과목들에서 1등급을 받고 1학기를 마무리했다.


그 때 엄마가 얼마나 뛸듯이 기뻐했는지, 엄마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내가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엄마는 그 때부터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았고 나는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부모님의 기대를 다시 얻어냈다.


고등학교 첫학기에 그렇게 좋은 성적을 얻고 나니까 나는 그 이후로 점점 더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쯤에 나는 나 자신을 ‘당연히 공부 잘하는 아이’로 생각했고, 어느새 ‘열심히’가 아니라 나는 미친듯이, 죽도록, 독하게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이후에는 그만큼 행복했던 시기가 없었던 것 같다. 그 후로는 늘 공부에 매달려있었고, 마음은 점점 더 긴장되었고, 친구들과 유쾌하게 어울리는 것도 점점 줄어들었고 가혹하게 나 자신을 몰아붙여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후에 그렇게 좋은 성적을 받은 학기도 다시 없었다.


어쨌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잠을 안 자서 얼굴은 초록색으로 누렇게 떴고, 쉬는 시간이고 언제고 할 거 없이 공부만 하고, 밥먹으면서도 공부했고, 몸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다보니 마음은 독기로 가득 찼다. 나는 마치 내가 공부못하던 애라는 걸 잊은 것처럼 항상 내가 공부를 잘했던 것만 같았고, 반드시 서울대에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반에서 나만 공부하고 있을 때에도 보이지 않는 전국의 적들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늘 긴장하고 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부모님도 내가 공부못하던 시절을 잊은 것처럼, 혹은 사춘기 시절의 스쳐지나가는 방황이었던 것처럼 내 중학교 시절을 이야기했고,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서 내가 정신을 차리고 ‘나 자신을 되찾았다’는 식으로 말했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중학교 때 그렇게 철없이 굴지 말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외고를 갔다면 서울대에 갈 확률이 더 높아졌을텐데, 내가 어쩜 그렇게 철없이 공부를 안 했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죽도록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내가 공부를 다시 잘하게 되었지만, 다시 원래의 궤도로 돌아와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애로 취급받지만, 내 안의 반짝이는 빛이 다 없어진 것 같아’하는 감상적인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렇게 독하게 공부를 해서 나는 강남 8학군 여고를 문과 수석으로 졸었했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졸업식 날에 문과 수석부터 상을 받았기에 (그 다음 이과 수석이 받았다) 내가 가장 먼저 강단에 올라가서 상을 받았는데, 좋아야한다고 생각해서 좋았지만 뭔가 마음이 허무했다.

졸업할 때는 학교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상을 받는 게 자랑스럽지도 않았고, 졸업을 한다는 게 기쁘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냥 좀 무감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에는 좋았다. 이제는 그래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서울대학교를 다닌다는 게 영광스럽게 느껴졌고, 새로 만난 동기들도 선배들도 너무 좋았다. 처음 한 학기는 정말 즐거웠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하루에 한 잔 커피를 마셨는데,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강의시간마다 커피를 사들고 들어가고, 공강 때는 또 카페에 가서 친구들과 수다떠느라고 하루에 3잔씩 커피를 마셔댔다. 고등학교때까지는 편의점 커피만 마시다가 카페 커피를 마시니까 또 커피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대학생이 되었으니까 이제 공부는 별로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고 맨날 커피만 마시면서 수업은 시험보기 싫어서 다 드랍해버리고 11학점만 들으면서 노닥거렸다. 그리고 별 거 하지 않아도 친구들과 여기저기 놀러다니고 수다떨고 새로운 사람들 만나고 노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부터, 모든 것들이 서서히 시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들하게 느껴지는 게 몹시 두려웠다. 모든 게 시들하게 느껴지는 내 마음을 부정하고 싶었고 설레고 즐거운 감각을 붙잡고 싶었다.

나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동생 말로는 내가 대학교 1학년 6월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대학에 오면 좋을 줄 알았는데, 인생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라고 해서 아빠한테 혼나고 잠잠해졌다고 했다. 그랬었나?

어쨌든 확실히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겨울에는 분명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다 재미가 없고, 아무 의미가 없고, 인생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나의 미래는 불투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에는 ‘대2병’이라는 말이 유행을 해서, 나는 내가 대2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대2병에 걸린 후로 다시 인생은 생기를 잃어버린 것 같았고, 그 때 내게 위안이 되어주었던 것은 인문대와 사범대 사이에 있는 파스쿠찌였다.


그 당시에 나는 삶이 너무 불안하다고 느꼈다. 공부는 너무 어려웠고, 서울대학교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머리가 그닥 별로인 편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고, 즐겁게 느껴졌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또 다시 인생은 불투명하고 침울하게 느껴졌다.


그 때는 그런 느낌에 빠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내가 그런 느낌을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내가 공부를 못해서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수업을 거의 다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전공수업은 더군다나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시험이 없고 쉬운 과목들만 골라서 11학점, 12학점을 들었는데 그마저도 학점이 좋지 않았다.

내가 이토록 불안하고 공허한 건, 진로가 불투명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진로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이렇게 모든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지고 그토록 좋았던 사람들을 만나도 무감각하고 불안하기만 하다는 것을 이상하게 느끼진 못했다.


1학년 때처럼 친구들과 맨날 몰려다니며 수다떨던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나는 혼자서 카페에 가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마음이 왜 외로운지도 모르는 채로 외로울 때 혼자 카페에 앉아서 소파에 몸을 묻고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앉아있으면, 외로움은 조금쯤 낭만적으로 느껴지고 그러면 무언가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매일같이 인문대와 사범대 사이의 파스쿠찌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보통은 아침, 점심 두번 정도 카페에 갔지만 유독 힘든 날에는 저녁에도 갔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책을 다시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아침에 파스쿠찌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일기를 쓰고 책을 읽기도 하고, 점심에는 파니니를 사먹고, 저녁이나 주말에는 때때로 과제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외로움을 커피에게 맡기는 법을 익혔다.

바깥으로 숲이 보이는 통창이 널찍한 카페에 앉아서 고소한 원두향을 맡으면서 커피 한잔을 마실 때, 진한 커피가 몸을 타고 내려갈 때, 달고 쌉쌀한 향이 입에 퍼질 때, 구석 소파에 몸을 파묻고 포근한 느낌을 온 몸으로 느낄 때, 그것이 주는 낭만이 나를 위로하고 나를 설레게 했다.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나는 심각한 카페인중독자가 되어서 위염에 걸려도 참지 못하고 커피를 마시고, 어쩌다 커피를 늦게 마시는 날에는 하루종일 깨질듯한 두통에 시달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커피를 끊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전에는 다음 날 아침 커피 마시는 시간을 기다렸다.


커피가 없었다면 나의 지난 15년이 얼마나 훨씬 더 외롭고 고되었을까?


매일같이 커피를 마시는 게 몸에 좋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지난 날 나를 변함없이 지탱해준 커피에 감사하고 싶다.

아주 작은 힘일지라도, 절망적인 순간에는 그 조금의 힘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기대되지 않는 매일을 보낼 때, 내일을 생각하면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이, 그게 커피 한잔이라고 할지라도, 사실은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지난 날들 나는 그렇게 커피에서 위안을 찾으며 공허감을 버티다보면 커피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지극히 열성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모색하고 있다.


지금 나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는 나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그 시간 동안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내가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마음에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가슴을 비옥하게 덥히는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내 마음 속 반짝이는 무언가를 회복해보고자 하고 있다.


그 때가 되면 어쩌면 지금처럼 내가 커피에 의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커피가 지금처럼 이토록이나 애틋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면, 삶이 그 자체로 설렐 수 있다면, 그때는 커피를 마시는 즐거운 시간이 삶의 보다 작은 부분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 하루는 커피에 의지해서 글을 썼다. 아마 그 때까지는, 항상 그랬듯 고마운 마음으로 의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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