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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양 Jun 13. 2023

[1화] 우리 엄마는요

이해받지 못한 마음

안녕하세요. 저는 10살 어린이입니다. 

나의 데미안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저는 길을 잃어버린 상처많은 한 소녀였습니다.

제가 길을 잃어버렸다가 어떻게 데미안을 찾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럼 한번 여행을 떠나볼까요.   





저희 엄마는 사랑이 참 많은 분입니다. 열정도 많은 분이셨죠. 20살에 지방에서 서울로 혼자 올라와 옷가게를 창업하셨고, 26살이 되어서 저희 아빠와 결혼을 하셨습니다. 결혼을 함과 동시에 전업주부가 되셨고, 언니, 저 그리고 동생 이렇게 세 남매를 낳아 가족을 꾸리셨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희미한 기억으로는, 엄마는 매우 강한 분이셨습니다. 큰며느리로써의 역할에 충실하셨고, 저희 아빠를 보좌하고, 주말에는 성당에 나가시며, 아이 셋을 거뜬히 키우는 그야말로 슈퍼우먼이셨습니다. 그 어떤 궂은일도 알아서 척척 해내시고 심지어 표정과 말투는 상냥하기까지 하셨죠. 저희 언니를 초등학생 내내 학교를 쫓아다니며 학급 반장을 만드셨고, 저를 여러 학원에 보내면서 재능 키우기에 몰두하셨습니다. 엄마 덕분에 저는 호기심을 채우면서 재능 부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제 남동생을 낳은 것은 장손을 낳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큰 며느리와 엄마로써 그리고 아내로써 역할을 다하기 위한 우리 엄마의 노력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끔가다가 엄마는 아주 무섭게 저를 혼내셨습니다. 특히 제가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줌마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그냥 집에 앉아있었던 저를 무턱대로 아줌마의 딸과 저를 비교하면서 공부를 안하고 놀고 있다며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매로 때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어렸던 저는 당시 엄마는 나보다 이웃집 아이를 더 예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참했습니다. 제 존재가 초라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이런 일이 꽤 여러 번 반복되었지만 뭐 어쩌겠어요. 제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해도 우리 엄마인데. 당시에 불만이 많았지만 이야기할 생각조차 못하고 엄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불만을 꾹꾹 마음속에 눌러담았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고, 심지어 제가 정말로 잘못된 존재인줄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제 심장에는 미안함으로 멍이 조금씩 번져갔습니다. 내가 엄마를 기쁘게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서요.      


그런 강하고 욕심많은 엄마가 무너지는 걸 처음으로 본 것은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병원에서 만성콩팥병 판정을 받은 엄마는 거의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혼자 흐느껴 우셨어요. 당시 만성콩팥병은 거의 죽을 병이나 다름없었거든요. 엄마의 주변 지인들이 하나둘씩 우리 집에 찾아와서 침대 맡에 의자를 두고 위로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짙은 무게가 제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어요. 좁다란 다른 방에서 저는 언제나 숨을 죽이고 있었고요, 순간 저도 모르게 울컥울컥 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꾹 참았습니다. 제가 갑자기 울어버리면 어른들에게 더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았어요. 그럴 때마다 제가 했던 행동은 모든 것들을 마음에 묻어둔 채 눈을 감고 자는것이었어요. 어렸던 저는 무거워진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사는게 아니라 그저 견디기 급급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침묵을 지키는게 유일한 답이라는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침묵밖에 없었어요. 깊은 무력감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을 아빠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아빠가 콩팥을 떼어 다른 콩팥병 환자에게 기증하고, 다른 기증자의 콩팥을 엄마가 받기로 했다는 것이죠. 엄마 아빠가 둘 다 콩팥이식수술을 위해 병원에 몇 달간 입원해야 하니 학교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보습 학원에 등록을 해 놓을 테니 빼먹지 말고 잘 다니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집에 큰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말 없이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을 해보다가 엄마에게 제가 콩팥을 떼어서 엄마에게 주겠다고 말을 했어요. 그 순간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그래, 고맙다.”라고 하셨어요. 내가 엄마를 생각하는 진심을 알아챈 것 같았어요. 그러고서 엄마 아빠는 바로 다음날 입원을 하셨어요. 엄마와 아빠가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때 기억들이 아주 생생합니다. 분명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모든 세상은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가득했고, 수업시간에 학급 친구들이 선생님 말씀에 깔깔깔 웃을 때 저는 분위기에 맞춰 애써 힘겹게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습니다. 친척들이 가끔 집에 와서 언니와 저 그리고 동생이 잘 있나 봐주시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주시고 구구단도 가르쳐주시곤 했습니다. 사실 그때 친척 어른들에게 엄마 아빠가 병원에 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을 들을까봐 겁이 덜컥 나서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중에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고민은 ‘내가 혹시 고아가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저는 하루하루를 가슴을 졸이며 지내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엄마의 콩팥 이식수술은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저희 엄마는 앞으로 남은 생을 신장투석을 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일주일에 3번 굵은 주사바늘을 팔에 꽂고 4시간을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고 평생 소변은 볼 수 없었습니다. 축 쳐진 어깨로 병원을 주기적으로 오고가는 엄마를 보면서 저는 항상 걱정이었어요. 엄마가 갑자기 건강이 안좋아져서 죽으면 어쩌나, 걱정이 컸습니다. 엄마가 잘 때 몰래 옆에 가서 손가락을 코에 갖다대보고 살아있는지 확인해보는 일도 빈번했어요. 이런 걱정과 불안은 저에게 일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불안, 공포, 걱정이 일상이었던 저는 점점 말을 하지 않는 성격으로 변해갔습니다. 저의 걱정이 또 누군가의 걱정이 될테니까요. 표현하지 않고 숨겨야만 했습니다. 


저의 이 마음을 그 누가 알아줄까요? 이 세상에 단 한명이라도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요? 이 투박한 세상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한 존재가 있다면 저는 어떤 기분일까요? 아마도 그 사람 앞에서 난 초라한 겁쟁이가 될테고, 그런 저를 눈치채고 분명히 놀려대거나 더한 공포 속으로 몰아세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가장 연약한 측면을 보여줘서 부끄럽기도 하고, 그럼에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안도감에 아마 바로 펑펑 눈물을 흘릴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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