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의사 나르시시스트
최근 SNS에서 <나르시시스트 감별법>이란 주제의 글과 영상이 눈에 띈다. 사람들은 혹시 ‘내가 나르시시스트가 아닐까?’ 혹은 ‘주변에 나르시시스트가 있고 나를 이용하거나 해를 끼치는데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우려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찾는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론 굳이 저런 감별법을 보지 않아도 된다.
일단 스스로 나르시시스트일까 의심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없다. 그들은 그런 병식(insight)이 없다. 본인이 나르시시스트라는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원래 나르시시스트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지 않으며, 그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아 병원을 찾는다. 그러므로 내가 나르시시스트일까 봐 걱정한다면 일반인 수준의 평범한 양심과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다.
또한 주변에 나르시시스트가 있다면 절대로 모를 수가 없다. 단 1시간, 아니 10분만 같이 있어도 일단 그 사람이 이상하다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으며, 며칠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거슬린다. 눈썰미가 있다면 ‘아, 이런 사람이 나르시시스트’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가끔 나르시시스트와 잘 지내는 사람도 있는데, 나르시시스트가 특유의 공격성, 통제욕을 드러내지 않고 숨긴 채로 대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상태에 대해서 모르고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들조차도 나르시시스트의 이상함을 깨닫고(love-bombing, 과도한 의존성 등) 멀어지게 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아니지만 의대생 때 정신과학을 배우며 인격장애를 공부했기에 개념은 익숙하다. 인격장애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특히 우리 일상에서 마주칠 법한 자기애성이나 경계성 인격장애가 유난히 흥미로웠고 이해하기 쉬웠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막장 썰', '진상 썰' 속 주인공이 현실에서 살아 돌아다닌다고 상상하면 된다.
의대생 때는 그들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정말 이런 성격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스스로 경계성 인격장애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었다. 자존감이 낮고 남자친구에게 의존적이었던 20대 초중반엔 인격장애까진 아니어도 최소한 그런 성향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신 질환 진단을 위해서 반드시 붙는 단서 조항 '일상에 심각한 영향을 줄 정도'로 나 혹은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한 적은 없었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었을 때 나를 돌아보면 단점은 있을지언정 그냥 평범한 인간이었다.
불행하게도 의대와 병원에선 나르시시스트를 마주칠 확률이 다른 공간보다 높다. 타고난 머리가 좋은 경우라면, 나르시시스트는 지적능력을 통해 얻은 사회적 지위로 존재를 과시하려 하며 그런 의미에서 전문 면허와 고소득이 보장되는 의사라는 직종은 나르시시스트에게 굉장히 매력적이다.
의사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은:
1. 권위에 목숨을 건다. 특히 교수직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의대와 병원은 철저한 도제사회이고, 나르시시스트는 상위자 선배에게는 절대복종하고 온갖 아부를 떨지만 하위자인 후배에게는 통제와 하대가 일상화되어 있다. '나는 저런 명의와 어울리는 사람이야'라는 믿음이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자기 우월감과 권위욕을 정당화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2. 타 직종이나 동기, 후배를 무시하고 지적 우월감을 과시한다. 특히 간호사 등 파라메딕을 비하하고, 자신이 의사이며 전문가라는 점을 내세우며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는 식의 언행을 구사한다. 환자의 진단이나 치료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자신이 항상 정답이라는 태도를 보인다.
3.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과대평가가 일상화되어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내가 없으면 이 환자는 죽었어'라는 사고 아래 환자와 보호자를 과도하게 통제하려 들며, 꾸짖고, 지나치게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환자-의사 관계를 선호하며, 환자나 보호자가 의사 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거나 참여하려 들면 매우 불쾌해한다.
4. 비판에 대한 과민반응을 보인다. 동료로부터 사소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회의 자리에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보이면 과도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변명이나 핑계는 예사고, 대놓고 공격하기도 한다. 내가 겪었던 의사 나르시시스트는 공식 회의 자리에서 간호사가 본인과 다른 의견을 냈다고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안타까운 건, 머리가 좋고 일을 열심히 하며 윗선에게 아양을 떠는 나르시시스트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교수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살면서 마주쳤던 의사 나르시시스트는 모두 선배 의사였으며, 현직 교수였다. <언젠가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 속 '명은원' 캐릭터처럼 후배나 타 직종의 평에 따라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런 식의 권선징악은 현실에선 매우 드물다. 의사 나르시시스트를 견디지 못해 오히려 좋은 사람이 떠나고, 후배 나르시시스트가 선배 나르시시스트의 행적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의국에는 나쁜 사람만 남는 결과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