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helpmyselfblog.com)
“당신만의 신념을 아주 가치롭게 업글해 보아라.
그래서, 신념 하나로도 배 부를 수 있어라.
신념 하나로도 매우 가슴 벅찰 수 있어라.
신념 하나로 당신을 완성하여라!”
인간은 누구나 자기 신념에 몸부림치며, 때로 매우 아파하고 고뇌에 휩싸이기도 하는 존재이다.
이는 항상 진리를 갈망하고, 세상에 대한 깨우침에 목말라하는 그 지극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진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개념일 것이니, 그것을 대신하여 과학이나 종교, 예술 등에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이나 종교, 예술 또한 고정된 정답의 덩어리는 절대 아닐 것이며, 오로지 세상 속에서 인간과 함께 계속 진화해 나가야 할 개념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 등에 대한 자기 자신만의 총체적인 믿는 방향, 관점 혹은 가치관을 과연 ‘자기 신념’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한마디로, 자기 신념은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자기 신념의 속성을 보면, 누구는 자기 신념에 개인 철학적 혹은 사상적 요소가 강할 것이고, 누구는 지식적 요소가 강할 수 있고, 누구는 법(法)적인 요소가 아주 강하게 내포되어 있을 수 있고, 누구는 과학적 요소가 강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구는 예술이나 종교적 요소가 아주 강하게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내재된 자기 신념의 속성에 따라, 세상사에 대한 자시 반응의 방향 또한 제각기 다를 것이다.
세상사에 반응하는 느낌, 감성, 이성적 판단마저도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신념은, 평소에 이를 자주 의식하든 안 하든 간에, 그 누구의 삶에 있어서도, 실질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아야 한다.
모든 세상 일을,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면, 자기 신념대로 이루어져 나간다고도 볼 수 있겠으니 말이다.
즉, 누구든 자기를 둘러싼 모든 일들을 자기 신념에 따라 항상 생각하고 반응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생각과 반응은 거기에 걸맞은 자기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러한 행동은 또다시 자기 신념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 아니겠는가?
결과적으로, 자기가 도모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자기 신념과 너무나도 닮은 그러한 수준의 결과를 빚어낼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이렇게도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는 자기 신념을 보다 돈독하게, 더욱 가치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첫째, 유불리보다는 ‘옳고 그름’을 논하여라.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려 할 때는 객관성이나 합리성, 타당성, 정당성 등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이는 그 판단의 결과를, 결코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가장 온전하게 이끌어 낼 수 있는 핵심 요건일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핵심 요건을 잘 챙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든 판단에 있어서, 항상 이익과 손해의 관점이 아니라, 유리하고 불리함의 관점도 아니라, 오로지 ‘옳고 그름’의 관점으로 판단하려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여기에 ‘정의로움’의 관점을 추가할 수 있다면, 더욱 훌륭하겠다.
만약, 어떤 판단에 있어서, 상대를 극히 의심하여, 마치 색안경을 끼고 보듯이, 이렇게 하면 누구에게 유리하고, 저렇게 하면 다른 누구에게 유리하다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게 된다면, 이는 옳은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적절한 선에서 서로 타협을 하자는 식으로 되어버리기 쉽다.
물론 살다 보면, 서로 적절한 선에서의 타협이 필요할 수도 있겠으나, 처음부터 이러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주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진실을 포기하거나 팽개치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방식”이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 초기에는 철저히 정답을 찾아가려는 마음, 즉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려는 진실된 마음을 견지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진실성을 잘 보인 후, 나중에 최종적으로는 서로가 양보를 해가면서 적적한 타협을 마다하지 않는 그러한 다소 유연한 마음도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처음부터 상호 간에 타협점 혹은 서로 간의 양보 가능한 선이나 수준부터 논하기 시작한다면, 일처리가 아주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버릴 수 있다.
결국은, 적절한 선에서 서로 타협을 이루어 내기는 했으나, 아주 일시적인 미봉책에 그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라면, 온전한 합의의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여, 원래의 문제가 조만간 다시 불거질 수도 있고, 그 이슈를 더욱 키워버릴 수도 있겠다.
즉, 이렇게 처음부터 타협만을 위한 협상이라면, 그 근본 바탕이 매우 약하게 되고, 그 타당성이나 근거 또한 심히 의심받게 되어, 언제라도 그 결과가 뒤집히기 쉬우며, 협의 이후 실행 단계에서도 얼마든지 의의 제기나 입장 번복의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니 모든 대화나 협의, 협상 시에는, 일의 유불리나 손익을 우선적으로 따지지 말고서, 항상 옳고 그름의 관점으로 먼저 접근하여 대화나 협의를 이어나가려는 진실한 태도가 좋다.
또, 이러한 협의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에도 보다 신경을 쓸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이를테면, 그 옳고 그름의 잣대가 양자 간의 관계에서만 해석되게 하지 말고, 보다 넓게, 이웃에게까지도 좋은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되도록 해 보면 좋겠다.
인간 사회는 모든 부분이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작은 사건 하나라도 결코 독립적으로 유지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특히, 사회적 정의로움이나,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이 살아있다면, 그 협의의 결과는 더욱 훌륭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모든 일처리를 탄탄하고 정의로운 자기 논리와 자기 신념으로 진행하여야, 그만큼 자신감도 많이 붙을 것이고, 더군다나 나중에 그 협의 결과가 뒤집힐 우려도 매우 적을 것이고, 그 실행 단계에서도 서로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신념은 가치가 없다.
자기 개인의 신념을 위해서 상대나 이웃을 결코 팔아서는 안 된다.
상대에게 무엇인가 부담을 주는 신념은 최대한 피하여라.
어떤 형태로든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크고 작은 고통을 안겨주는 신념은 더더욱 피하는 것이 좋겠다.
비록 자기 신념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아주 보편타당할 수 있는 그러한 선상에 놓여있어야 함이 마땅하다.
특히, 자기도 모르게 진영논리에 휩쓸려, 사회의 절반을 적대시하거나 악마화를 해서는 절대 안 되겠다.
항상 자기 뇌리와 가슴은 깨어있되, 그 어느 한쪽 진영으로 빨려 들어가서는 좋지 못하다.
이는 결코 쉽지만은 않은 준칙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아주 냉철하게 한번 생각해 보자.
만약 당신이 한쪽 진영으로,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면, 당장은 그 진영 안에서 스스로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많은 소통을 이어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좁은 시야의 소통은 금방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점차 확증편향 혹은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늪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헤어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세상에 아무리 절반이 자기편이라고 하여도, 나머지 절반이 자신의 적이라고 한다면, 장차 이를 과연 어떻게 감당해 내겠는가?
특히, 당신의 정신이 끝내 온전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메타인지 능력이 괜찮을 수 있겠는가?
아마 어림도 없을 것이다.
아니, 운이 좋으면, 잘 감당은 잘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되는 적군의 공격에 많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은 스스로 몸져 드러누울 지경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정신세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균형을 잃어갈 것이고, 결국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절반을 얻기 위해, 나머지 절반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매우 곤란하다.
절반을 행복을 위해 나머지 절반에게 부담을 주거나, 힘들게 하여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언제나, 자기 인생에서 더욱 치명적인 존재는 자기 반대편에 서 있는 크고 작은 세력들일 것이니 말이다.
또한, 무엇보다 이러한 진영논리의 가장 큰 폐해는 당신 스스로를 세상의 진리로부터 계속 멀어지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당신이 평생을 통해 그토록 갈망하던, 그토록 얻어내고 싶었던 진리와 멀어지게 되면, 당신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려고 하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신념이 마구 흔들리고 무너져 내린다면, 과연 당신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걸어가려 하는가?
남은 생을 그냥 호의호식하면서 살면 그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결코 물질적인 요소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니 말이다.
당신의 선택이나 행동이 당신 스스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의 보편적 진리의 선상에 잘 놓여있게 하여야 할 것이니 말이다.
모쪼록, 세상의 진리는 절대 한쪽 진영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니, 아무리 가짜 뉴스가 판을 쳐도, 엄청난 유혹이 세상을 뒤덮어도, 마치 악마가 당신을 엄습해 오는 한이 있어도,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균형점을 잘 유지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렇게 상대에게 무엇인가 부담을 주거나 힘들게 하는 신념 혹은 상대를 마구 적대시하려는 신념은 그 가치가 거의 없을 것이니, 언제나 주변 사람을 편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급적 예쁘게 보아주고, 무엇이든 가급적 어여삐 보아주고, 가급적 지긋한 너그러움과 애정으로 보아줄 수 있는 그러한 지극한 마음이 잘 담긴 신념을 기꺼이 택하여라.
당신이 만약, 스스로의 자존감과 자긍심이 매우 큰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강한 긍정을 온 세상에도 똑같이 이루어 내려할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매우 엉뚱하게도, 어떤 사람이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혹은 자기 착각이나 편협된 사고에 기인한 신념의 볼모가 되어, 주변 사람들을 마구 괴롭히거나, 극단적인 진영으로 접어들거나, 사회적으로 큰 사고를 내거나, 심지어는 범죄적 행위를 자행한다고 한번 상상해 보아라.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셋째, 얕은수를 멀리하여라.
어떤 사리의 판단에서도, 얕은수로서 사실에 조금이라도 덧칠하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금방 탄로가 나거나, 얼마가지 못하여 그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가 발생 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식으로 얕은 주장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한 얕은 주장은 바로 상대에게 반박거리를 제공하게 되거나,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 당신 주장 전체의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심히 의심받게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아주 얕은수로써, 절대 어떤 일을 ‘침소봉대’하는 일도 없도록 해야 한다.
큰 것은 크다고 이야기하고, 작은 것은 작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지, 작은 것을 크게 떠벌리고, 큰 것을 작다고 이야기하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내어놓게 된다면, 이 또한 상대에게 공격거리만 제공할 뿐이다.
또 금방 당신의 밑천이 드러나고야 만다.
결국은 당신 스스로의 말이 ‘어불성설’ 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평정한 마음을 기준으로 가장 공정하고 타당한 해결책에 접근하여 대화하려 해야 한다.
자기 신념이 아무리 자기 혼자만의 신념이라고 할지라도, 타인이 간섭할 문제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할지라도, 이렇게 얕은 수로 점철된 신념이라면, 장기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아무런 가치도 결코 부여해 주기 어려울 것이다.
가령,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가 있다고 해 보자.
그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내기 위해, 불법, 탈법, 합법 등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아주 얕은수를 많이 동원하여 여러 꼼수를 많이 부리기도 하고, 매사 ‘치고 빠지기’ 작전으로 일관하기도 하고, 앵벌이나 등쳐먹기와 유사한 행각을 일삼기도 하고, 가히 ‘먹튀 논란’마저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스타일이라고 한번 가정해 보자.
이러한 행태로 자기 삶을 일관한다고 하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스스로는 자신의 행동이 결코 불법적이지 않음을 주장하기도 하고,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는, 자기 본 무대에서 쓸쓸한 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렇게 형편없는 처신 방법을 자기 신념으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신념을 과연 누가 인정해 줄 수 있겠는가?
아주 반듯하고 정당한 신념임을 누가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 통념에서 엄청나게 괴리되어 있고, 사회적 인심에 완전히 이반 되어 있을 것이니 말이다.
오히려, 엄청난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질 수 있고, 조만간 사회적으로 아주 큰 심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과연, 이렇게 아주 얕은 자기 신념을 가진 자라면, 조만간 스스로 사회적 고립을 면치 못할 것이며, 자기 신념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 신념의 참다운 가치는, 가히 요원하지 않겠는가?
넷째, 열린 신념, 포용적 신념이어야 한다.
세상에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니, 자기 신념 또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계속 변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사회적 가치 또한 항상 변해가는 것이니, 어제의 가치로움이 오늘의 가치 없음이 될 수 있고, 어제의 가치 없음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가치로움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가령, 과거에는 아날로그적 지식이나 행동 양식이 큰 각광을 받았었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 독일 등지에서는 이러한 아날로그적 생활양식(현금 사용, 금속 열쇠 사용, 각종 오프라인 문화 등)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물론, 일본이나 독일 등의 나라가 디지털도 잘 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사회적으로 아날로그적 생활양식의 가치(대체적으로 볼 때, 고전적 가치, 보수적 가치, 신뢰의 가치, 예의와 존중의 가치 등을 대변하는 가치)를 잘 인정해 주고, 존중하기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미 디지털적 생활양식이 아날로그적 생활양식을 압도하고 있다.
또, 일본, 독일 등의 나라 또한 아날로그적 생활양식에서 디지털적 생활양식으로 제법 빠르게 옮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단지, 그 속도나 사회적 가치 비중이 다소 차이가 날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시대적 변화의 흐름에 따라, 자기 신념 또한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즉, 시대적 가치가 바뀌고, 시대적 추구점이 계속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데, 자기 신념이 아주 완곡하게 고정되어 있을 수는 없다.
만약,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자기 신념을 아예 붙들어 매고 있다면, 이는 옹고집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회적 고립 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시대의 유유한 흐름에 따라, 항상 자기 신념을 잘 업글해 나가야 한다.
아주 가치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타인의 좋은 생각이나 신념도 기꺼이 받아들여, 자기 신념에 잘 접목을 해보고, 그래서 자기 신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노력도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른바 포용적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타인의 생각이나 신념도 항상 존중하고서, 이들의 좋은 점을 최대한 인정하고서, 잘 받아들여 타산지석으로 삼기도 하여서, 자신의 신념이 더욱 공고하게 할 수 있어야 하겠다.
혹여, 타인의 생각이나 신념이 별로라고 생각이 되더라도,
절대 쉬이 낮추어 평하지 말아라.
마구 나무라지는 더더욱 말아라.
그것이 설령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분명히 아주 훌륭한 점을 많이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남들이 과연 어떻게 보든 간에, 한 사람의 인생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것일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매우 열리고 평정된 마음으로, 당신의 반듯한 신념이, 전정한 신념이 언제나 빛날 수 있도록 하여라.
언제나 겸손하고 겸허하게 당신 신념을 잘 업글해 나가라.
그래서, 절대 구태의 모습은 없도록 하고, 고집스런 집착은 더욱 없도록 하고, 항상 매우 새롭게 업글해 나가라.
결국, 당신은 신념 하나로도 배 부를 수 있어라.
신념 하나로도 매우 가슴 벅찰 수도 있어라.
신념 하나로 당신을 완성하여라.
세상 속에 당신 신념의 향기가 그득하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