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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그린 Jan 06. 2023

그라데이션으로 향하는,

<경계선> Border, 2018

설모에게.


해가 바뀌어 스물아홉 살이 되었어.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기분이야. 열일곱 살에는 학교를 때려치울 용기가 있었고, 스무 살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시위할 정의감이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마냥 평범하고 싶어. 세상이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안정적으로 흡수되고 싶어.


이렇게 정상성을 욕망할수록 나의 결을 마주해. 나는 세상의 중심에서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얼씬대는 사람이구나. 자칫하면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겠구나. 오늘의 영화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해.





티나는 출입국 세관 직원으로 일하고 있어. 그녀는 후각으로 사람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 있어. 수치심, 분노, 죄책감 같은 감정을 냄새로 맡는 거야. 그녀에게 적발된 여행객들은 대부분 범죄 행위에 가담하고 있어. 미성년자면서 술을 반입하거나, 핸드폰에 아동성착취물 영상을 가지고 있지.


그러던 어느 날 티나는 유달리 수상한 냄새를 맡아. 그 사람을 불러 세우지.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해. 결국 맨몸검사를 진행하는데 그의 꼬리뼈에 커다란 흉터가 있다는 걸 알게 돼. 그 순간 티나는 그에게 다가가. 자신에게도 그러한 흉터가 있기 때문이야. 그의 이름은 보레. 명확한 직업도 거주지도 없는 비밀의 남자야.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려. 닮은 점이 너무 많았거든. 티나는 보레를 통해 자신이 트롤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돼. 그러자 지금껏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돼. 유달리 추했던 자신의 외모를, 성별을 구분할 수 없었던 자신의 성기를,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근본적인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게 돼. 인간이라는 정상성은 그녀를 결함 있는 존재로 만들었지만, 트롤이라는 정체성은 그녀를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티나는 인간으로서 금지되었던 것들을 하기 시작해. 벌레를 먹 나체로 뛰어다며 자유로움을 느껴. 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시.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해. 아동성범죄자들과 보레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보레는 트롤을 고문하고 학살했던 인간에게 복수하기 위해 인간의 아이를 납치하고 인신매매하고 있었어. 


보레는 티나에게 트롤로서의 정상성을 요구해. 인간을 증오하고 말이야. 티나는 딜레마에 빠져. 롤과 인간의 경계에서, 사랑과 윤리의 경계에서,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에서 그녀는 선택해야만 해.




티나는 보레를 경찰에게 넘겨. 그러나 보레는 바다에 투신함으로써 사라져. 그녀는 다시 고독한 일상으로 돌아가. 결말에 이르면서 티나의 삶이 아름다우면서도 너무 외로워서 내내 울 것만 같았어. 그러나 영화는 결코 절망적으로 끝나지 않아.


티나는 택배를 하나 받지. 트롤의 아이가 들어있는 상자를 말이야. 울어대는 아이에게 티나는 벌레를 먹여. 러자 아이가 싱긋 웃어. 그 미소를 담으며 영화는 미래를 낙관해. 쩌면 이 아이는 꼬리를 굳이 잘라내지 않고, 흉터를 가지지 않고 살아갈지도 몰라.

  

이 영화는 경계선으로 시작했지만 그라데이션으로 끝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하는 선을 지우고, 인간과 트롤을 구분하는 선을 지우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선을 지우지. 그렇게 여기저기를 드나들며 발자국을 남기고 경계를 허물어. 허물어진 자리에는 그동안 지워졌던 존재들이 호명되지. 퀴어,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말이야.


따뜻하게 경계를 허무는 이 영화 덕에 왠지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어. 그라데이션이 켜켜이 쌓인 세상이 기대 돼. 그런 세상에서 나는 굳이 정상성에 매달려 살지 않아도 되겠지.





추신-.


어떤 영화를 보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끝내 찾지 못했어. 이번에는 네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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