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썬>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극영화다. 주인공 소피는 20년 전 아빠와 함께 갔던 여행을 추억한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뚜렷해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어른이 된 소피는 그때의 아빠를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저 다정하고 따뜻했던 아빠가 아니라 어딘가 부서져 버린 한 인간의 모습으로 말이다.
인생은 위대해요
당신보다 위대하고
당신은 제가 아니거든요
제가 아무리 다가가도
당신 눈에 거리감이 느껴져요
이런,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제가 자초한 거예요
저 구석에 제가 있어요
저 조명 아래에서
제 신앙심을 잃고 있어요
당신한테 맞추려 하는데
할 수 있을지 이젠 모르겠어요
이런,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당신의 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당신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당신이 애쓰는 걸 봤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꿈이었을 뿐
울고불고 애쓰고 그저 꿈이었을 뿐,
꿈이었을 뿐, 꿈이었을 뿐
어린 소피가 홀로 무대에 올라 불렀던 노래는 이 영화의 주제를 담고 있다. 아빠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는 아빠라는 태양의 이면을 생각해보게 한다. 아빠는 위대하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동화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아빠와의 거리감에 나는 움츠러들고 조심스럽다. 그래도 용기 내어 말한다. 그 시절 아빠의 웃음소리와 노래와 애씀은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당신은 그저 혼란스러운 조명 아래 방황하는 인간일 뿐이었다고. 이 영화는 그렇게 아빠에게 손을 내민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도 아빠를 떠올렸다.
나의 아빠는 음악가다. 가곡을 작곡하고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지휘를 한다. 나는 무대에 오른 아빠보다 집에서 악보를 그리는 아빠를 더 좋아했다. 아빠가 작업할 때면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음표들을 구경했다. 음악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빠의 품 안이 좋았다.
아빠는 음악가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대학에서 20년을 시간강사로 근무했지만 끝내 교수 임용이 되지 못했다. 우리 집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건 선생님인 엄마의 몫이었다. 아빠가 대학을 떠났을 때 부모님은 이혼했다. 아빠의 꿈이 사라지자 가족이 해체된 것이다.
아빠는 한동안 악보를 보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했다. 물류창고에서 짐을 나르고, 방역업체에서 벌레를 잡으러 다녔다. 어린 내 눈에 아빠의 달라진 모습은 이상했다.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시간을 흘러 아빠와 나는 가끔 보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면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늘 헤어질 때쯤이면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고는 했다. 나는 어느 순간 엄마처럼 아빠에게 잔소리하고 있었다. 묵묵히 내 말을 듣던 아빠는 불현듯 화를 내고는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소원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올레길을 함께 걷자고 했다. 우리는 함덕 서우봉 앞에서 만났다. 아빠는 평발인데도 곧잘 걸었다. 저만치 앞서가다가 문득 나를 기다려주기도 했다. 아빠는 우연히 사람들과 마주치면 호탕하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아빠의 모양’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가장의 역할, 예술가의 품위, 노동자로서의 가치 같은 것들을 참 많이도 따졌다. 그러면서도 아빠가 삶을 어떤 리듬으로 걸어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빠를 흔쾌히 따라나선 적도 없었다.
특유의 걸음걸이로 올레길을 완주하는 아빠를 보며 그에게서 물려받은 아름다운 것을 생각했다. 나는 예술을 사랑한다. 나만의 언어로 삶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뛰어난 작품을 보면 감탄하고, 그런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에 슬퍼하다가, 다시 열변을 토하며 감탄한다. 아빠는 이런 내 모습을 거리낌 없이 아주 잘 이해한다. 그리고 내가 실패한 예술가가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나는 아빠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방황하고 부서진 아빠를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애프터썬>을 보고 소피의 아빠 캘럼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나의 아빠는 여전히 음악이라는 길 위에 서 있다. 틈만 나면 오케스트라 연주곡을 듣고, 성인 취미 합창단에 나가 지휘하고, 중고등학생들에게 음악의 기초를 가르친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음악을 찾아내는 아빠를 보며 성공과 실패로 규정되는 예술이 아니라, 완주하는 여정으로서의 예술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피 역시 자신의 삶과 아빠와의 관계를 긍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애프터썬 aftersun> 감독 : 샬롯 웰스 주연 : 프랭키 코리오, 폴 메스칼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시간 42분 연령등급 : 1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