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보내는 나날이다.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없고, 마주하는 말들을 잘 삼키지도 못하고 있다. 출퇴근 길에 멍하니 <정희진의 공부>를 듣는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최근의 시사와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해 말하는 팟캐스트다. 5월 호에서는 영화 <밀리언달러베이비>를 다뤘다. 이 챕터가 좋아서 반복해서 듣고 있다.
<밀리언달러베이비>는 복싱에 대한 영화다. 나는 그동안 복싱은 때리는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픈 행위를 왜 하는가 이해하지 못했다. 정희진은 이 영화를 통해 복싱은 '잘 맞는' 스포츠라고 했다. 가드를 올리는 방법, 날아오는 주먹을 잘 받는 방법에 대한 운동인 것이다. 삶은 고통이고 불행이고 언제 어디서 나를 공격해 올지 모르는 이벤트다. 나는 오랫동안 삶을 극복하거나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덜 아프게 맞을지, 어떻게 저 주먹을 맞받아칠지를 알아야 한다. 복싱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즘 자주 운다. 지난 2021년도의 상황과 비슷해졌다. 다만 달라진 것은 방구석에서 울지 않고 산책하면서 운다는 것이다. 건강해지려는 욕구와 서러운 현실이 중첩되어 따스한 햇살 아래서 터벅터벅 운다. 나만큼이나 잘 우는 한 친구가 말했다. 숨어서 울지 말라고. 남들 앞에서 우는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위라고.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조금은 떳떳하게 운다.
어제 그림책 모임에서 안드레스 로페스의 <끄로꼬>를 읽었다. 빨간 악어인 끄로꼬는 어느 날 길을 걷다가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끄로꼬를 발견한 뱀과 새와 원숭이들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자신들만의 방법을 알려준다. 뱀은 꼬불꼬불 몸을 꼬아서 올라오라고 하고, 새는 나는 방법을 알려주고, 원숭이들은 나무 타는 방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악어인 끄로꼬에게는 무리다. 원숭이들은 힘을 합쳐 끄로꼬를 꺼내주려는데 그마저도 실패한다. 다른 동물들의 도움마저도 받을 수 없는 끄로꼬는 절망스러워서 엉엉 운다. 그러자 눈물이 구덩이에 가득 차서 끄로꼬는 헤엄쳐 나올 수 있게 된다. 주변의 다정함으로도 어쩔 수 없는 구덩이의 상태에서 오직 스스로의 눈물로 빠져나오는 끄로꼬를 보면서 나의 처지를 생각했다.
사람들이 잘 맞고 잘 울었으면 좋겠다. 다들 겁에 질려 있어서 그토록 짖어대는 것이니까. 약해질까 봐 두려워하지 말고 약해짐에 떳떳했으면 좋겠다. 나조차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해봐야겠다.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과 수목원에 가기로 했다. 그 이와 함께한 기억이 또 나를 살아가게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