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기 때문에 (21)
나와 함께 자란 친구와 20년 만에 안녕하려 한다.
20대에 처음 접하고 최근까지도 나를 목메게 만든,
오랫동안 나를 채찍질하며 평생 함께해 온,
그러면서 아직까지도 그 속내를 모르겠고,
이름조차 계발인지 개발인지 아직도 헷갈리게 만드는
'자기계발'이 바로 안녕하고 있는 그 친구이다.
그 친구에 관한
온갖 유명한 책은 다 읽었을 것이다.
온갖 실천론은 다 해보았을 것이다.
지독하게 까지는 아니어도 20여 년간 내 삶을 들여다보면 그 어떤 자기계발론자에 뒤지지 않을 만큼 살았다.
그리고 이제야 희망고문 시키던 녀석과 안녕해 가는 중이다.
해볼만큼 해보고 생각할 만큼 생각하고 온갖 시행착오를 다 겪어보고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니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나하고 잘 맞지 않는 친구였던 것 같다.
마치 언제 가는 나를 성공의 단상에 올려 줄 것만 같았던 친구,
하루하루 절망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희망으로 나를 일으켜주던 친구,
언제나 내 곁에 있지만 자꾸만 보이지 않던 그 친구..
어찌 살아야 할지 모를 때마다 그 친구의 바짓가랑이를 힘껏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힘이 들면 힘이 들수록 주저앉지 못하게 하고
또 여유가 생기면 여유를 부린다고 경고하며
잠시도 나를 편안하게 두지 않았던 그 친구를
이제야 보내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편안해졌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조금씩 진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꼭 봐야 할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친구와 안녕하고
억지로 나를 옥죄던 부지런함을 놔버리고는
나는 더 부지런해졌다.
그 친구와 안녕하면서
성공에 대한 또 물질에 대한 욕망을 놔버리고는
진짜 성공하는 인생의 길이 다가왔다.
그 친구를 버리면서 몹시도 불안했다.
세상에 뒤처질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뒤쳐짐을 택하기로 했다.
앞장서서 불안하게 뒤돌아보기보다 앞서가는 이들을 보며 그저 뒤쳐진 채로 멈추지만 않기를 바라며 안녕했다.
어쩌면 부지런히 또 열심히 살아가는 내 인생이 힘겨워 편안히 살고자 하면서, 꼼수를 부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평생 나를 옭아매며 희망고문하던 그 자기계발과 안녕했다.
요즘 내 삶은 단조롭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적인다. 그러다 마음에 들면 보고 아니면 만다.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는 의무감 따위는 없다.
세상과 발맞춰 살아가야 하는 의무감을 없애니 맞지도 않으면서 꾸역꾸역 해왔던 수많은 일들을 놓게 된다. 그 수많은 일들을 놓으니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훨훨 날아오르는 것 같다. 날아오르니 더 많은 것을 깨치게 된다.
이제 나에게 있는 의무감은 하나뿐이다.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는 것.
언제가 내 앞에 펼쳐질 그 드넓고 힘겨운 길을 달려가야 할 때 쇠약한 육체가 내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함이다.
한 번씩 욕심이 또 눈앞을 아른거릴 때면 인간으로서 세상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만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세상에 누가 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갈지만 궁리한다.
그러면 조금 힘든 일도 할만하다. 그냥 할만하다.
으쌰으쌰 일기장에 빼곡히 열정을 적을 때보다 훨씬 수월하다.
성공하지 못해도 이 지구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편안하다.
마음이 편안하니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하고
마음이 열리니 문 닫혀 있던 세상이 나에게 절로 다가온다.
참 좋은 일이다..
나를 위한 자기 계발과 안녕하니 이기적인 내가 힘을 잃어간다.
병들었던 나와 안녕이다.
우울했던 나와 안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한 삶을 위해 택했던 너와 안녕했더니
참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