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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우리 서로 만날 수 없지만

by 빛방울

5월의 봄날. 출근하는 길에 시설 주무관님이 반갑게 인사하신다.


"선생님. 혹시 이게 뭔지 아세요!

이 무슨 식물인지 모르시죠? 허허허."


늘 지나가다가 심상치 않은 식물에 눈이 갔다. 난초도 아니고 파도 아닌 것이 이건 무슨 식물이 길에 꽃밭 군데군데 심겨 있는 것일까.


의문이 풀리는 순간.

너에게 눈길도 주지 않다가 너의 진면복을 이제야 알게 되었구나.


나의 수상한 눈빛을 읽으셨던 걸까!

퇴근하시는 길(시설 주무관님은 밤새 학교를 지키시다가 아침에 퇴근을 하신다.)에 걸음을 멈추시고는

"이거 보세요." 하며 눈길을 끄는 손짓.


"이게 바로 상사화라는 꽃이에요.

좀 있으면 꽃이 피는데 이런 잎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핀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어요."


신기한 듯 연신 '어머, 어머. 아, 진짜요?' 큰 눈을 뜨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추임새를 넣는 내게 설명해 주시는 주무관님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셨다.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쳐줄 때 아이들이 재밌어하고 신나 하며 빠져드는 순간, 나도 목소리가 한층 격앙되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선생님, 모르셨죠? 얼마나 슬프길래 이름도 상사화가 됐겄어요."


"네, 말씀 안 해주셨으면 몰랐을 거예요. 감사해요!"


"나중에 꽃피면 꼭 보세요! 꽃이 또 기가 막힙니다."


주무관님의 설명을 듣지 못했다면 상사화의 잎을 보고도 그 자리에 꽃이 핀 줄 모르고 잎과 꽃을 다른 존재로 여겼을 것이었다. 잎은 그 형체를 못 알아보게 사라져 버리고 나서야 꽃대가 올라오니 그럴 수밖에.


출근길에 듣는 꽃이야기가 이토록 싱그럽고 신비로울까. 늘 아침에 나는 출근하고 퇴근하시는 길에 인사만 나누던 주무관님의 고운 시선이 느껴져서 감사했다. 손 경례를 가볍게 하시고는 유유히 떠나시는 주무관님을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미소가 지어졌다. 자연을 사랑하시는 마음, 연세가 지긋하심에도 세상을 호기심 어리게 보시는 듯하다. 퇴근하던 길에 멈추어섰던 주무관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아마도 혼자서만 알고 있는 상사화가 안쓰러웠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널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혼자서 얼마나 외롭겠니? 너를 있게 해 준 잎사귀도 만나지 못할 너의 운명. 네 이름을 불러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너를 기억해 주는 또 다른 이가 늘어난다면 애절하고도 구슬픈 네 마음이 좀 달래지지 않을까나.' 하시면서 내게 가르쳐주신 건 아닐까?


상사화를 노래로만 알고 있었고 노래 속에서 만든 이름인 줄만 알았는데 그날 아침은 너무나도 신선한 꽃 충격을 받았다.


푸른 잎들이 모두 사라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여름날. 키가 큰 긴 꽃대에 모여있는 분홍 꽃들을 드디어 만났다.


'너로구나. 네가 말로만 듣던 상사화구나. 곧 네가 피어날 거라며 푸른 잎들이 나한테 전해주고 갔단다. 잎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한참을 기다렸어. 반가워. 너 참 곱다.'

상사화. 사연을 알고 나니 네가 달리 보여.

상사화(안예은 노래)

사랑이 왜 이리 고된가요
이게 맞는가요 나만 이런가요
고운 얼굴 한 번 못 보고서
이리 보낼 수 없는데
사랑이 왜 이리 아픈가요
이게 맞는가요 나만 이런가요
하얀 손 한 번을 못 잡고서
이리 보낼 순 없는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험한
길 위에 어찌하다 오르셨소
내가 가야만 했었던 그 험한
길 위에 그대가 왜 오르셨소
기다리던 봄이 오고 있는데
이리 나를 떠나오
긴긴 겨울이 모두 지났는데
왜 나를 떠나가오


https://youtu.be/YMle1suRKeg?si=MI8Yxwp1C7HTw_6R

상사화의 여러 버전이 있지만 국악의 맛도 함께 느껴보시라고 이 곳을 공유해본다.


만날 수 없음에도 이 자리에 그렇게 있었겠지. 그대를 생각하며 눈물로 꽃을 피웠을 상사화. 얼마나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야속하게도 스치는 순간 없이, 다른 시대를 사는 듯 연결된 시대에 존재할 뿐.


우리가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존재들. 그들과의 소중한 인연들이 지나간다. 이렇게 만나지도 못할 애절한 사랑이 아닌 동시대에 함께 존재하는 내 인생지기들이 새삼 소중하다.


내가 있던 곳을 스치고 지나간 소중한 존재들 역시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미치니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상사화.

어쩌면 살면서 이토록 아픈 가슴을 안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 핀 꽃처럼 오랜 기억으로, 여운으로, 사진으로, 추억들로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그 모든 하나하나.


슬픔으로만 아픔으로만 눈물로만 채워지지 않기를 바라본다. 그 누군가에게 전해질 작은 메시지가 되길...



표지 사진 출처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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