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첫 번째라면 한 가지만 떠올라야 하는데 내게 가장 가까운 어린 시절부터 슬라이드를 딸깍 집어넣듯 띄엄띄엄 남아있는 기억을 꺼내어본다.
엄마와 시골 외갓집에 가던 날, 덜컹이던 버스에서 내리자 짙은 흙냄새가 났다. 오빠들은 엄마와 나를 뒤로 하고 먼저 외갓집을 향에 내달렸다. 오빠들은 대문으로 가지 않고, 외갓집 옆에 있는 과수원 길목 철조망이 쳐진 곳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나도, 나도 저리로 갈 테야.'
엄마와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나도 울타리를 향해 달려갔다. 오빠들처럼 빨리 뛰어들어가고 싶었다. 누렁이들도 보고 싶고, 외갓집 사촌 언니들도 얼른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짧은 다리로 힘껏 뛰어오르긴 했지만 내 맘과 달리 철망에 얼굴이 닿아 긁히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다쳤던 그 순간은 기억에 나지 않는다. 끊긴 기억 뒤로 오랜만에 친정에 도착하여 반가웠을 얼굴 대신 근심 가득한 엄마의 속상한 얼굴이 떠올랐다. 퉁퉁 부은 얼굴에 알 수 없는 누런 약을 볼에 더덕더덕 발랐던 기억뿐이다.
외갓집에서 찍은 삼남매
사촌 언니가 나를 달래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빗으로 곱게 빗어주고 양갈래로 땋아주면서, "아이고, 예쁘데이. 우리 공주가 세상에서 젤 예쁘네." 하며 내 눈치를 살폈던 기억. 그리고 언니의 보드랍고 통통한 손길이 이마로 볼로 스쳐 지나간 촉감이 떠오른다. 조각난 기억이지만 내 턱에는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흉터가 남은 추억인데도 통증의 기억이 없어서일까. 시골길을 달렸던 뿌연 기억들과 많은 친척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따뜻함이 뒤섞여 내 어린 시절의 많은 기억들은 외갓집에 머물러있다.
엄마는 팔남매 중 다섯째. 형제가 많으니 나에겐 사촌들도 많다. 외갓집에 가면 사랑방에 모여 아랫목에서 이불을 깔아놓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대학 간 언니, 오빠, 나와 비슷한 또래 사촌들, 벌써 장가가서 아기를 낳은 사촌오빠의 아기까지 북적였다.
어른들도 그들의 세계에서 오랜만에 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 우리는 우리끼리 여름날 집 앞 냇가로 물놀이를 갔다. 6살이었던 나는나보다 세 살 많은 소현이 언니 손을 잡고 땡볕을 건너갔다. 허리 높이라 발이 바닥에 닿으니 어린 나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다행히 열댓 명 남짓 사촌들과 가장 빨리 장가간 형철이 오빠랑 큰 언니 오빠들도 동행했다.
수영도 못하는 나는 물속에서 수영하는 동네 사람들 틈에 몸을 담가 수영하는 흉내를 냈다. 개구리처럼 팔을 휘저으니 물 위로 떠오르는 듯하다가 갑자가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순간 다른 세계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바깥세상의 소리와는 전혀다른 소리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고요하고도 무서운 어둠이 엄습했다.꼴까닥 입과 코에 물이 들어가고 온 팔과 다리를 발버둥 치는 순간 부웅하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형철이 오빠가 물에 빠진 나를 발견하고 건져 올렸던 것이다. 매운 코를 부여잡고 그제야 울기 시작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젖은 물 때문인지 울면서도 정신이 없었다. 두려웠던 마음과 매운 물맛에 오빠 목을 세게 끌어안고 '엄마, 엄마!'만 불렀다.
수영장과 달리 바닥이 고르지 못한 냇가에서 어느 순간 발이 쑥 꺼지면서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나보다.
"개안타, 개안타. 놀랬나?"
울면서 집에 갈 줄 알았는데 기억 속의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울음을 멈추고 물에서 실컷 놀다가 우르르 집으로 돌아왔다. 형철이 오빠랑 오빠의 아들 성민이의 손을 꽉 잡고 돌아온 기억. 근데 희한하게도 그 기억이 끔찍하게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한 뼘 자라난 마음이 들었다.
'나도 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어, 내가 누나라서 씩씩하게 참고 물놀이 하다가 왔어.' 하는 누나가 된 마음.
"성민아, 누나가 안아줄까?"
무용담처럼 물에 빠져봤다고 큰일 날 뻔했는데 살아 돌아왔노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형철이 오빠는 저녁을 먹는 내내 내가 물에 빠졌던 이야기, 울었던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밥상에 앉아서 나는 말없이 밥을 먹었지만 나 대신 이야기해주는 형철이 오빠가 고마웠다. 그리고 내 생명의 은인인 오빠한테 고맙다는 말은 못 했지만 그 보답으로 성민이랑도 엄청 잘 놀아주고 예뻐해 주었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다.
나에게 첫 번째 기억이라기보다 내게 인상 깊은 어린 시절의 추억 중의 하나.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또 다른 추억이 떠오를지 모를 일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속에 그림처럼 소중하게 간직되어서 가끔 꺼내보면 그때로 돌아가서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신기하고 소중한 추억들이다.
딸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내 턱에 남아있는 흉터를 보여준다. 희미해진 상처만큼 아픔은 사라지고 소중한 기억만 자리잡은 흔적처럼.
"엄마, 나도 기억나는 거 있어."
"뭔데?"
"내가 엄마 진짜 좋아한 옷 있었는데 엄마가 누구 준다고 해서 구석에 막 숨겨놓은 적 있어. 근데 엄마한테 버리지 말라고, 주지 말라고 말 못 했어. 왜 그랬지? 나 그 옷 진짜 좋아했는데. 그리고 어느 날 없어졌더라. 지금도 내가 갖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딸이 유난히 좋아하던 분홍색 물방울무늬 옷. 작은 옷들은 주변에 더 어린 친구들에게 보내주거나 낡은 옷들을 처리하곤 했는데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이렇게 아쉬워했다는 것도.
"그랬어? 엄만 몰랐지. 예쁜 옷이야 많지만 그중에 애착 가는 옷이 있더라. 봄이가 엄마한테 얘기했으면 아무도 안 줬을 텐데 아쉽네. 그래도 사진 속에 남아있을 테니 그걸로 아쉬움을 달래 보자."
"엄마는 봄이한테 입히면서 좋은 추억이 있었던 옷 하나는 남겨 놓았어."
"진짜? 그게 어떤 옷인데?"
"아빠 아시는 분이 손으로 직접 만들어주신 조끼랑 치마. 그걸 입혀 놓으면 그냥 귀여워서, 그걸 입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추억이 떠올라서 그 옷은 남겨놓았지. 볼래?"
옷장 서랍 맨 아래에 상자를 열어서 봄이에게 보여주었다. 분홍색 물방울무늬 옷이 없어서 속상했던 마음을 표현했다가 그 옷을 열어 보여주니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추억을 지금 있는 자리로 가져오는 것은 아름답다. 소중한 기억을 다시 어루만지며 그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