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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캐기

맛있구마! 쑥쑥 크겠구마!

by 빛방울

"다음 주부터 엄청 추워진대요!"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차,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계획도 없이 갑작스레 캐야 했다. 고구마는 따뜻한 환경을 좋아하는 작물이라서 추울 때 수확하거나 두면 썩을 수도 있다. 이래 봐도 고구마를 직접 심고 캔 지 어언 6년 차. 시골 학교에서 있었던 덕분에 할 수 있었던 귀한 경험 덕분이다.


"얘들아, 우리 오늘 고구마 캐야 하는데 어쩌지?"

"와, 고구마 캔대. 선생님, 빨리 캐러 가요!"


내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대신 고구마를 캐러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 만으로 신이 났다. 우선 고구마를 캐는 방법부터 설명하고 아이들과 고구마를 캐러 갔다. 가볍게 움직이는 아이들과 달리 내 마음은 비장해졌다. 내 한 손엔 호미 대신 삽을 들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스타킹에 원피스를 입고 온 아이, 구멍 슝슝 뚫린 슬리퍼를 신고 온 아이, 하얀 티셔츠를 입고 온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부모님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고구마! 얼어 죽을지도 모를 고구마부터 살려야 한다.


고구마를 처음 심을 때부터 아이들은 언제 고구마를 먹냐고 물어봤다. 심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잎이라도 따서 먹을 판이었다.


"얘들아, 고구마가 땅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뿌리가 땅 속의 영양을 먹고 통통해져야 해."

"굵어진 뿌리가 바로 우리가 먹는 고구마란다."

고구마가 아이들에게 잊힐 무렵, 드디어 고구마를 캐는 계절이 왔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을 위해 아껴둔 사이다 작가님의 <고구마구마>를 읽어줬다. 아이들은 듣는 내내 깔깔거리고 웃는다.

"고구마가 길쭉하구마. 고구마가 조그많구마. 털났구마."

생김새도 맛도 다른 고구마를 작가의 재치 있는 표현으로 책은 웃음보따리 그 자체다. 읽어주는 나도 듣는 아이들도. 아마도 고구마를 캐며 아이들이 고구마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을까? 은근슬쩍 기대해 본다.

우리 반 고구마 밭에는 어떤 고구마들이 숨어 있을까?


사이다 작가의 고구마구마, 예스 24 캡

나가기 전 고구마 캐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 팔을 걷어부치고 호미로 고구마 줄기 주변을 둥글게 그어 놓고, 살살 파야 한다. 그 주변에 있다는 생각으로 조심조심. 그렇지 않으면 고구마가 호미의 날카로운 부분에 긁히면 상처를 입게 된다. 하지만 1학년 아이들에게 그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호미로 파다가 흙을 뿌려서 다른 아이 눈에 들어가지 않아도 성공이다. 호미를 휘둘러서 다른 친구를 다치게 하지만 않아도 성공이다. 줄기마다 둥근 선을 그어주고 모둠별로 호미를 하나씩 쥐어주었다.


삽을 들고 있다가 "선생님!" 소리만 들리면 나타나 삽으로 그 주변을 더 깊이 파주는 작업을 해준다. 삽질은 군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 여기요, 여기 고구마가 보이는 것 같아요!"

"좋아, 다치지 않게 살살 주변을 파고 구해줘!"


고구마가 하나만 발견돼도 그때마다 환호성이 나온다.

"와아! 고구마다!"


아이들이 소매 끝엔 흙들이 맺혀있고, 흙 속에 신발이 반은 들어가 있다. 이미 양말을 벗은 친구도 있고 흙에 철퍼덕 앉아서 온몸으로 땅을 파고 있다. 그러다가 땅굴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는 이상하다. 고구마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삽질을 하는데도 고구마는 잘 안 보이고 삽질만 내내 한다. 작년에는 한 박스 가득 수확해서 하나씩 집으로 보내고 남은 것은 찐 고구마에 맛탕까지 해서 먹었는데 말이다.


주렁주렁 달려야 캐는 맛이 나는데 아이들은 땅 속에 보물을 찾느라 땀을 다 쏟았다. 딱 16개. 크고 작은 고구마들과 아이들의 호미질에 잘리고 상처 입은 고구마가 뒤섞여서 담겨있다.


작년에는 고구마가 조금만 파도 주렁주렁 열렸는데 올해 날씨 탓인지 고구마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의 마음과 달리 아이들은 직접 캔 고구마를 보며 기뻐했다. 빨리 먹자고 난리난리.


얼마 되지 않은 고구마를 깨끗이 씻어서 집에서 쪄왔다. 한 개씩 먹지도 못하고 조각조각 잘랐구먼. 고구마 파티라는 이름만 붙여도 신이 난 아이들.


"얘들아, 고구마가 어떤 맛이야?"

아이들은 달콤하고 달달한 맛, 부드럽고 촉촉한 맛, 껍질이 뻑뻑하지만 쫀득한 맛, 꿀맛, 정성이 들어간 맛이라고 표현한다.


그중에 마음 고운 나정이가 천천히 말한다.

키가 쑥쑥 크는 맛이에요.


그래, 너희가 직접 심고 캔 고구마 먹고 쑥쑥 크렴!


언제나 그렇듯, 땅이 주는 선물은 이렇게 수확할 때마다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수확량이 적어서 아쉽고 속상하지만 땅을 원망할 수 없다. 이런 날씨에도 내내 품어주고 길러서 우리에게 귀한 먹을거리를 선물해 주는 것에 대해 언제나 경이롭고 감사하다.


진짜, 고맙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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