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주도적인 삶
우리는 청소년 시기에 많은 어른들로부터 참 많은 조언을 듣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나는 부모님, 선생님, 가족 어른들, 그리고 TV에서 들은 수많은 조언들 중 정작 새겨들은 말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른들이 저마다 자신의 경험에서 배운 값진 조언을 전해줄 때 우리는 그저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 수많은 잔소리 중 ‘자기 주도적인 삶’이라는 말은 그리 낯설지 않은 말이다. 그저 잔소리 중 하나로 지나쳤던 말이지만, 사실 청소년기에 꼭 갖춰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주도적인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고 노력한다면 효율은 분명 극명하게 차이 날 것이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기대를 충족하는 것이 전부였던 나는 항상 그 대단한 가문에 누를 끼칠까 걱정했다. 장래희망을 묻는 어른들께 그들의 눈치를 보며 하나씩 직업군을 나열하다가 ‘과학자’라는 말에 흡족해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막연히 ‘과학자’가 장래희망이 되었던 유치원 시절에서 나는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에 와서 가족의 드라마로 정신이 없던 와중에 내 진로 문제를 놓고 둘째 고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둘째 고모는 한국에서 중학교만 마치시고 미국에 오셔서 수십 년이 지나 불혹의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셨다. 미국의 검정고시에 해당하는 GED를 마치고 계속해서 공부를 이어가신 끝에 쉰이 넘은 나이에 심리상담사가 되셨고, 후에는 로드아일랜드 한인회장을 지내셨다. 그런 고모가 제안하셨다.
“진규야, 너는 다른 유학생들처럼 돈 처발라서 비싼 대학교 갈 생각 하지 말고 커뮤니티 컬리지(Community College)에 가서 2년 공부하다가 정말 원하는 과를 찾으면 그때 4년 제로 편입하는 게 어떨까? 고모 주변에 보면 한국식으로 ‘좋은 대학’ 가는 데 올인하는데 그러고는 졸업도 못 하고 돈은 돈대로 날리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너는 지금 GPA도 4.2라며? 충분히 커뮤니티 컬리지에 가서도 잘할 거야. 2년 동안 등록비 아끼고 GPA 관리도 잘해서 큰 대학에 편입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때쯤 되면 영어도 지금보다 편하고 하니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은데?”
“고모랑 이야기해 봤어? 어때? 아빠가 생각했을 땐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해 봐.”
저녁에 아버지가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런데 편입이 그렇게 쉬워요?”
“한국만큼 어렵진 않을 거야. 고모도 했잖아.”
“네…”
그렇게 나는 Community College of Rhode Island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우리 가족은 재편되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결혼식이 끝나고 거의 바로 아버지는 중대 발표를 했다. 집을 팔려고 내놓았고, 우리 가족은 집이 팔리는 대로 버지니아로 이사 간다는 계획이었다. 새어머니의 조카 부부가 사는 곳과 가깝기도 하고, 한인이 거의 없는 로드아일랜드보다 사업이나 일자리 기회가 버지니아에 더 많다는 이유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이사를 두 번 다니고 새어머니의 조카 부부 댁에 잠시 얹혀사는 생활 끝에, 우리 가족은 북버지니아 센터빌(Centreville, VA)의 자그마한 타운하우스에 정착할 수 있었다.
나는 나름 들뜬 마음으로 버지니아에 있는 Northern Virginia Community College에 입학을 준비했는데, 이미 이사를 마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타주에서 살다가 온 나는 out-of-state student로 분류되기 때문에 버지니아 커뮤니티 컬리지의 등록비가 in-state student보다 세 배 이상 비싸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1년 이상 버지니아 거주를 하면 in-state student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니까, 우선 1년은 알바 같은 거 하면서 경험 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네…”
그렇게 나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알바를 알아보게 되었고, 서너 군데에 이력서를 넣은 끝에 동물용품 대형 체인점인 펫코(PETCO)에 채용되었다.
아직 영어가 편하지 않았던 내게 기회를 준 건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점장님(General Manager), Mr. Inge였다.
원래 동물을 좋아하는 나는 즐기면서 일을 할 수 있었고, 점장님이 잘 봐주셔서 짧은 시간에 수족관 코너 매니저로 승진도 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버는 대로 저축하다 보니 통장에 어느덧 만 달러($10,000)가 넘게 모였다.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려고 일 시간을 줄였다. 드디어 in-state 자격이 주어져서 세 과목을 들으며 펫코에서도 알바를 하고, 내가 번 돈으로 학비를 내며 한 학기를 마쳤다.
“진규야…”
오전 수업 후, 알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데 아버지가 부르셨다. 진지한 분위기. 한국을 떠나오기로 결정하던 그날 저녁이 오버랩됐다.
“아빠가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지난번에 봤던 워싱턴 D.C. 에 조그만 그로서리(grocery) 가게야. 2주 후에 계약하고 바로 시작할 것 같거든.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나도 엄마도 영어가 서투르잖아.”
‘엄마’라는 단어는 아무리 들어도 거슬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새어머니도 많은 일을 겪으셨다. 그 사이 한국에 새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 나에겐 이복동생이 생겼는데, 선천적으로 희귀병을 갖고 태어난 동생은 몇 달을 살지 못했다. 이복동생이지만 나도 가슴이 저릴 정도로 슬픈 경험이었는데, 첫 아이를 잃은 새어머니의 심정은 얼마나 아프셨을지 짐작도 안 됐다.
그렇다고 다 커서 만난 내가 아들이 되어주기엔 어색함도 많았고, 무엇보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큰 시기였다.
“네…”
“그래서 말인데, 네가 한 1년만 도와줄 수 있을까? 아빠도 그냥 도와달라는 게 아니고, 네가 펫코에서 받는 거에 맞춰서 월급도 줄게.”
사실 그동안 쭉 걱정이 되긴 했다.
아버지는 미국에 오신 후 변변한 직장이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재산으로 집을 사고 3년 가까이 지내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를 일이었다.
이것저것 알아보고 시도해 보셨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다.
나도 늦은 나이에 미국에 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늦은 나이에 미국에 오신 아버지는 영어가 많이 서툴렀다.
대부분의 이민가정 자녀들이 그렇듯 나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마트에서 사 온 물건을 환불하는 사소한 일부터 병원이나 관공서의 일까지 폭넓게 아버지의 통역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나 역시 영어가 불편하고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제한적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버지처럼 의지할 아들이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존심이 상해도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네…”
학업이 걱정되긴 했다. 이미 뒤처진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동적인 삶을 살아온 내게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 더 이상 공부가 아니라 가게를 돕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돕지 않으면 가게 운영은 가능하실까?
동생은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내가 가게 일을 도와야 어떻게든 아버지 수입이 생겨 동생이 정상적으로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학교는 수업을 하나만 듣는 걸로 해서, 응? 왜냐면 아마 일주일에 5–6일은 도와줘야 할 것 같아서. 펫코는 그만두고.”
“네…”
“왜? 학교 때문에 그래? 그런데 네가 한국에 있었으면 지금 군대에 있을 나이 아니야? 네 친구들 대부분 군대에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 네가 그렇게 뒤처지는 건 아니야. 남들이 안 해본 경험 해보는 거지.”
“네…”
이번에도 나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펫코를 그만두고, 수강신청도 한 과목만 하고, 본격적으로 워싱턴 D.C. 에 있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침 9시 오픈을 위해 집에서 7시 반에는 나가야 했고, 하루 종일 바쁘게 가게 일을 하다 저녁 7시에 문을 닫고 집에 도착하면 9시였다. 꼬박 하루에 14시간.
아무런 사업 경험이 없는 우리 가족은 그로서리 스토어의 실상을 잘 알지 못했다. 물건을 하나 팔아봐야 큰 마진이 없었고, 하루 종일 끝없이 손님을 받고 자잘한 물건을 수없이 팔아야 간신히 우리 가족 생활비가 나올 정도로 원래 수익 자체가 크지 않은 사업이었다. 게다가 가게 위치도 갱의 활동이 잦은 위험 지역이어서 항상 긴장하고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가 말씀을 안 하셔도, 이 가게에서 버는 돈으로 내 월급을 감당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펫코에서의 내 시급만큼 내게 주고 나면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수익을 나눠야 했는데, 역시나 아버지는 내게 “일단 한 달에 500불”이라는 말씀과 함께 월급을 주셨다.
$500으로는 내가 부담하고 있는 휴대폰 요금, 학비, 자동차 보험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아직 요령이 없어서인지, 전(前) 주인인 노부부가 운영하던 가게를 우리는 세 명이서 달라붙어도 일이 많았고, 나는 주 6일을 꼬박 일해야 했다. 일을 안 나가는 하루는 학교에 가는 날이었기에 사실상 쉬는 날이 없었다.
아침은 보통 거르고 점심은 컵라면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고, 대신 저녁은 집에 오는 길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고깃집에서 폭식했다. 자연스럽게 배는 나오고 피부는 푸석해져서, 나는 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모습이 되었다. 게다가 한 공간에서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수없이 지적과 잔소리를 들었다. 강도 높게 지적하시고는
“원래 이래서 가족이 같이 일하면 더 힘든 거야. 나도 남한테는 못 할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하며 병 주고 약 주는 아버지였다.
정신없이 1년이 또 지났다. 처음에 약속한 1년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가게 사정이 안 좋아져 있었다.
영어 문제는 둘째 치고, 당장 내가 가게에 안 나오면 나 대신 누군가를 고용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도저히 이 가게에서는 그 비용을 감당할 수입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가게 사정이 어려워 내가 펫코에서 일하며 모아둔 만 달러($10,000)도 빌려드렸다.
역시나 부모님은 1년이 지났지만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 나는 자연스럽게 ‘영어 때문에 1년 도와주는 입장’에서 ‘싼 인력’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