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A (2)

요즘 노래

by 이진규

“형아, 나 라이드 좀 해줘.”


학교가 방학이라 모처럼 쉬는 날. 간만에 9시가 다 되도록 자고 있는데 동생이 흔들어 깨웠다.


“형, 나 친구들 만나러 가야 하는데 늦었어. 빨리 일어나서 친구네 집에 드롭오프만 해줘, 응?”


“야, 나 모처럼 쉬는 날인데…”


양치를 하며 수건을 찾는데 동생이 재촉한다.


“형, 그냥 이빨만 대충 닦아. 그냥 나 라이드만 해주고 올 건데, 뭐…”


“그래도 면도도 하고 머리도 감아야지.”


“면도까지 언제 해… 괜찮아! 누가 본다고…”


결국 잘 때 입었던 낡고 구멍까지 난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를 대충 걸쳐 입고, 엄마가 물려주신 초록색 포드 세이블 웨건형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익숙한 ‘끼이익—’ 소리가 나며 차가 덜덜거렸다. 색깔, 디자인, 연식, 성능 모든 면에서 내 또래가 타기엔 조금 창피한 차였다. 게다가 엄마가 타고 다니시며 남긴 크고 작은 기스가 범퍼를 뒤덮고 있어서,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일부러 멀리 주차하고 한참을 걸어가곤 했다.


“형, 근데 가는 길에 내 친구들 두 명만 태워서 가자. 어차피 가는 길이야.”


네 살 터울의 동생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한국 친구도 많았고 매일 약속이 있었다.

16살에 미국에 와서 한국 사람이 전혀 없던 로드아일랜드에서 4년을 보낸 나와 달리, 버지니아로 이사 오면서 동생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야, 이게 뭐가 가는 길이야… 정반대 방향인데?”


“다 왔어… 아, 저기 있네.”


도착지 앞, 동생의 친구 둘. 동생처럼 한껏 꾸민 여자아이들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고 싶었다. 한국에서 남고를 다니다가 미국에 와서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지낸 나는, 여자 앞에서 한없이 어색해졌다.


“안녕하세요.”


“어, 그… 그래.”


인사를 하며 뒷자리에 타는 아이들과 미러로 눈이 마주치자 말까지 더듬거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동생이 힐끗 내 눈치를 보더니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 형, 세종대왕.”


“히히히, 뭐야~”


“어? 세종대왕?”


“형, 세종대왕처럼 수염 있다고… 다 왔다. 여기서 내려주면 돼. 바이!”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리는 아이들에게 말없이 손을 들어 보이며 도망치듯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해 거울을 들여다본다. 눌린 머리, 지저분한 수염, 커다란 뿔테 안경. 추리닝 바지와 찢어진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뱃살. 누가 봐도 자다 일어난 아저씨였다. 네 살 어린 동생의 친구들을 의식하는 것도 한심했지만, 그보다 초라한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은 수도 없이 했지만, 돌파구가 없었다. 일주일 내내 가게에서 일하다 보니 외모나 옷차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시력이 나빠 두꺼운 안경을 써왔고, 가게 일을 하며 식사 시간을 놓치는 일이 많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저녁엔 폭식을 했다. 자연스레 배가 나왔고 피부는 푸석해졌다.


라면을 끓여 먹고, 컴퓨터 앞에서 오랜만에 싸이월드에 접속했다.

이젠 연락이 어색해진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고 미니홈피를 둘러본다.

함께 남고를 다니며 입시 스트레스를 견뎌냈던 친구들은 저마다 행복해 보였다.

대학 생활을 즐기며 여행하는 친구들, 연애 중인 친구들, 여럿이 모여 한잔 하는 사진들.

씁쓸함을 애써 삼켰다.


‘밖으로 나가야 해. 모처럼 쉬는 날을 이렇게 보낼 순 없어.’

목적지 없이 차를 몰았다. 학교 근처를 돌다 예전에 일했던 펫코(Petco)에 들러 음료수를 사며 아는 얼굴을 찾았다. 한참을 찾다가 한 명을 발견했다. 쉬프트가 달라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케이티였다.


“제임스는 지난달에 그만뒀고, 제이는 네가 나가고 얼마 안 돼서 군대 갔어. 새로 매니저가 두 명 왔는데, 다들 일하기 힘들다고 그만두는 분위기야. 나도 곧 나갈 듯…”


케이티와 어색한 허그를 하고 펫코를 나왔다. 목적지 없이 차를 몰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더 가봐야 돌아갈 길이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들어온 아무 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의자를 눕혔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곤 그렇게 한참 생각에 잠겼다. 반나절이 또 그렇게 지나갔다.


집에 돌아오니 동생이 언제 돌아왔는지 컴퓨터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왔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인사를 하는 동생을 보며 공허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요즘 노래는 뭐가 좋아?”


동생이 곁눈질로 힐끗 보더니 되묻는다.


“응? 뭐라고?”


“요즘 좋은 노래는 뭐가 있냐고…”


동생은 영혼 없는 말투로 드라마에 집중한 채 대답했다.


“다 좋지… 다 좋아…”


그날의 간절함은 뭐였을까. 나는 무엇을 바랐던 걸까.




그렇게, 아버지의 가게에서 ‘꼬박’ 4년을 보냈다.


가게 사정은 안 좋아져 세 명이 붙어 있을 필요가 없어졌고, 어느 날부터 새어머니는 출근을 하지 않으셨다. 한국에서 새이모가 미국으로 이민 오며 우리 집에 함께 살게 되었고, 고등학생인 동생과 철없는 새어머니, 새 이모 사이에서 집안은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었다.


결국 동생은 집을 나와 독립했다. 아버지는 단칸방이긴 했지만 몇 달치 월세와 차를 지원해 주셨다.

그 시절 동생도 나름 고생했겠지만, 한편으론 부러웠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와 새어머니, 친가 식구들 간의 갈등으로 고모들과 작은아버지와도 멀어졌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 어머니는 늘 하소연으로 두 시간을 채우셨다.


이쯤 되니,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인정받고 싶던 집안과 가문에 회의감이 들었다.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었다. 용인(龍仁) 이 씨는 개뿔. 원래 조선시대에 성을 가진 양반집안이 많지 않았는데, 광복 이후 대부분의 집안들이 돈을 주고 족보를 샀다고 들었다. 우리 집이 정말 양반집 가문은 맞나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가 속한 곳은 좁은 가게였고, 나는 아버지께 속한 값싼 인력이었다.

유행을 따라가는 것도 버거웠고, 어느 것에도 속할 수 없었다.


'요즘 좋은 노래'를 묻던 나는 그 끈이라도 잡고 싶었나 보다. 내 나이답게 유행가라도 듣고 싶었나 보다.


남들 같은 삶을 되찾지 못하더라도 너무 멀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누군가에겐 청춘인 20대 초반을, 나는 그렇게 보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