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A (3)

취업박람회

by 이진규

“이 펜 멋지지? 가져도 돼. 이리 와서 이야기 좀 하자.”


“…”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군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펜에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내 유니폼도 멋지지? 해군 정복이야.”


상하의 모두 순백의 세일러복.

상징적인 네커치프와 둥근 모자까지—추억 속 뽀빠이가 떠오르는 복장이었다.


“이름이 뭐야? 실례가 아니라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스몰토크에 응해야 했지만,

이미 손에 쥔 펜과 열쇠고리 때문에 마음 한쪽은 흐뭇해져 있었다.


모병관은 신나게 군대 이야기를 이어갔다.


군대라…


스무 살 중반이 다 되어가는 나는 가끔 숨이 막히듯 멀미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래보다 뒤쳐졌다는 불안이 몰려올 때면, 처음 아버지께서 가게일을 도와달라고 할 때, 나에게 하셨던 말을 떠올렸다.


“야, 그래도 너 한국에 있었으면 어차피 군대에 있을 나이잖아. 네 친구들은 다들 군대에 있지 않아?”


'그래, 지금 나는 군대에 있는 셈이다.' 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가까스로 불안감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몇 년 전 이야기였다.

친구들은 이제 대부분 제대하고, 졸업하고, 취업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누가 나이에 대해 물으면 나는 대답하기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사람이었다.


가게에서 아버지께 등신취급받으며 일하는, 값싼 인력일뿐... 몇년째 아무 성장도 없고, 성취도 없고. 그게 내 현실이었다.


여기에 군대까지?


그러면 나는 몇 년을 더 도태되는 걸까.

복무기간이 4년이면, 맙소사… 거의 서른이었다.


화장실을 들러서 모병관이 준 팸플렛을 몰래 쓰레기통에 버리고, 펜과 열쇠고리만 주머니에 넣었다.


나를 향해 웃어 보이는 모병관의 시선을 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경찰, 관공서, 소방관 부스를 돌아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생각했던것보다 형식적인 홍보였다. 굳이 취업박람회에 온 의미가 없어보였다.




며칠 전, 집으로 가던 차 안에서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신문에 보니까 이번에 페어팩스에서 취업박람회가 있더라. 한번 가볼래?”


“네?”


“아니… 그보다 엄마랑 얘기해 봤는데, 우리도 네가 나이는 먹어가고… 이렇게 우리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싫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명확한 진로 결정을 해야 서로 좋을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이 가게 일, 5년 더 해서 10년 채울래? 그러면 가게 네 명의로 넘겨서 운영하면 되고, 엄마 아빠는 천천히 은퇴할 수도 있고…”


또 그놈의 ’ 엄마‘. 아버지는 정말 내가 새어머니를 ‘엄마’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존중하지 않는 걸까.


“아니요… 저는 가게 일을 제 커리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바로 대답하지 말고… 생각해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네가 학교를 다시 다니든 직장을 잡든, 네 인생을 살아라. 우린 네 결정 존중하겠지만 이런 가게도 아무나 갖는거 아니야. 보통 사람은 평생 샐러리맨으로 일하며 모은돈으로 간신히 가질 수 있어. 네가 학교를 다시 다니겠다면 가능한 만큼 돕겠지만, 너도 가게 사정 아니까 많이 도와주진 못한다는거 알잖아. 대부분은 네가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할 수도 있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가게 일을 오래 하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늘 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아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오래 이 가게에서 일할 생각이 없어요.”




취업박람회를 다녀온 뒤,

기대와 다르게 건진 것도 없이 나는 허무하게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학교를 다닐 용기도 나지 않았다.

가게 사정을 뻔히 아는데, 같은 집에 살면서 일을 돕는대신 풀타임 학교라니...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가게 일을 멈추고 학교로 가버리면, 그동안 내가 붙잡고 있던 유일한 위로— ‘가족을 부양한다’는 의미와 ‘피해자’라는 입장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가족?

그런데 이 집에서 내 가족이 누구지?

아버지 말고…

새어머니? 새이모?


집을 박차고 나가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 반복되는 가게 일은 너무 고단해서 그런 결정을 내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스트레스는 한계치를 넘었고,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났을까.

새어머니의 조카—새 친척누나가 뜬금없이 연락을 해왔다.


“진규야, ‘크리스’라고 있잖아. 왜, 너희 집 들어갈 때 공인중개사로 부모님 도와줬던 누나 친구. 그 친구가 너랑 식사 한번 하고 싶다는데… 혹시 수요일 점심 시간되니? 고모부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네.”


여전히 내향적인 나는 낯선 자리가 부담스러웠지만,

솔직히 하루정도 가게를 쉬고 싶었던 시점이라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근처 한국 음식점에서 크리스와 마주 앉았다.


“안녕하세요? 나 기억나요? 크리스라고 합니다.”


“아… 네. 이진규입니다.”


크리스는 아주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한국말이 어눌했다.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어요. 형이 살게요.”


“아… 네…”


나는 메뉴판에서 가장 싼 음식을 시켰다.

크리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두세 가지 메뉴와 소주까지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며 크리스는 미식축구 이야기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하던 New England Patriots 얘기로 이어졌고, 나도 모르게 신나서 내가 팬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어느새 음식이 나왔다.


“이거 같이 먹어요. 만나서 식사하고 싶었어요. 왜냐면…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진규씨가 예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거든.”


크리스는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비슷하게 막막한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데 Army 들어가고 삶이 바뀌었어요. 진규 씨, 군대 어떻게 생각해?”


결국 이건가 싶었다.

새어머니와 각별한 사이인 새누나는 내가 입대해서 집에서 독립해서 나가길 바라는 걸까?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한 건가?


하지만 크리스는 진지했다. 어눌한 한국말로, 조심스럽게.


“알아요. 미국까지 와서 무슨 군대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it was not bad. 시간 금방 갔어요. 나는 짧게 다녀오려고 인펜트리로 sign-up 해서 3년 했어요. 그러면 어떤 benefit 있는지 알아요?

학교 tuition, 등록비… 공짜예요. 나 Virginia Tech 다녔어요. 나이가 많아서 창피했지만, who cares?”


깊은 이야기를 하자 크리스의 한국말이 더 흐트러졌다.


“지금은 회사 다니고 part-time으로 realtor도 하고 있어요. Life is good. 나쁘지 않아요. 부자 아니어도 자리 잡았어요. 진규 씨도 할 수 있어요.

내가 현진 친구라서가 아니라… I like you, bro.

진규 씨 상황… 우리 같은 사람만 알아, 다른 사람 공감 못해요.”


크리스가 진지하게 대화에 임해서인지 나도 진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 상황을 듣고는,


“에이, 그 집에서 나와요. That’s crazy! 몇 년을 더 낭비할 거야? $500 a month? are you kidding me?”


나는 웃으면서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조금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난 다음 주에 이사 가요. Reservist라 트레이닝받고 내년엔 파병 가야 해요. 그래도… 가끔 연락하자고요.”


크리스와의 대화가 나를 바로 입대로 이끈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성격도 크리스 같지 않았고, 영어도 자신 없었다.

게다가 크리스가 입대했을 때의 나이보다 나는 이미 두세 살이 더 많았다.


하지만 크리스는 내 안에 있던 막연한 반감을 지워줬다.


그리고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던 군대에 대한 관심은

그날 이후 서서히, 조용히 커졌다.


군대에 가면 부모님 도움 없이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집을 나와 내 힘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그건 어쩌면 모두에게 좋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몇 달 뒤—

반년쯤 흐른 어느 날,

나는 공군 모병소를 향하고 있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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