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광훈 Mar 31. 2024

파묘와 오타니

반일과 친일, 그리고 사과

흥행에 성공한 한국 영화는 보통 토론토 영화관에서도 상영을 해 준다. 물론 상영해 주는 곳이 많지는 않고, 한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영화관에서 종종 한국 영화를 상영해 주는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오늘 파묘를 보고 왔다. 


앞 부분은 공포 영화요, 뒷 부분은 판타지라는 평을 듣고 갔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배울 시간이 적었던 딸에게도 약간은 역사 공부도 되는 시간이었을 듯. 


그런데, 이 영화가 영화를 매개로 반일 감정을 부추긴다는 지인의 페북 글을 읽었다. 그 분 말고도 어떤 분은 오타니를 예로 들면서 아직도 반일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우리도 더 성장해야 한다고 일갈하는 글을 남기기도 하셨다. 


그래서 도대체 왜 파묘라는 영화를 논하면서 오타니 이야기가 나오나, 하고 검색을 해 보았더니, 얼마 전에 일본인 야구 선수 오타니가 태극기를 넣은 사진을 본인의 SNS에 올렸다는 것이다. 오타니와 파묘를 연결하여 말씀하신 그 분은, 한국인 운동 선수가 그렇게 했다면 한국에서는 친일, 매국 이런 내용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을 텐데,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신 거였다. 


글쎄,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쉽게 수긍하기는 어렵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도 없고, 게다가 가해자 제대로 된 사과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피해자가 성장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실제에서 크게 과장한 것도 없는 영화를 놓고 반일 조장이라 비판하는 것에도 동조하기 어렵다. 


예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이야기하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더 이상 사과를 구걸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의아했다. 그럼 우린 뭘 요구해야 하는 걸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본이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좋다, 우리도 더 이상 사과는 요구하지 않겠으나, 그렇다면 적어도 그 사과에 반하는 행동이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우리의 요구라고 했다.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래, 미안하지 않다는데 굳이 사과해 달라고 할 필요는 없을, 그 정도까지는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고 우리가 성장한 것이구나 싶어 좋았고, 일본의 이중성을 잘 드러내 주는 요구라 더 좋았다. 이건 내가 특별히 반일에 치우친 반일 인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일본인 친구도 많고, 일본 음식이나 문화에도 익숙하고, 한때는 일본어로 사업을 할 수 있던 사람이다. 


다만,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진정성 있는 사과라는 걸림돌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하고, 하지만, 일본은 사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사과에는 사실 정석이 있다. 나라와 나라, 개인과 개인, 회사와 회사, 혹은 회사와 개인, 이렇게 두 개체가 만나는 곳에는 사과할 일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 상황에서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더 발전할 수 없다. 


https://www.gainge.com/contents/videos/3124


일본에게 사과를 하라거나, 사과에 걸맞는 행동을 하라는 건, 반일이나 친일과 같은 말로 매도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언젠가 한국과 일본이 캐나다처럼 연방국가라도 이루지 않으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국력을 가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캐나다나 미국과 같은 형태로 오래 지속되려면, 일본이 한국에서 행했던 그 비 정상적인 행위들에 대한 감정적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반일에 반대하는 분들은 얼마가 간절했으면 영화인 파묘에서 반일을 읽어낸 것일까. 나도 그 간절함을 이해해 보려하지만, 그리고 어쩌면 일본과의 협력이 우리가 아시아에서, 세계에서 번창할 수 있는 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억울함이 아직은 그 분들의 간절함보다 훨씬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인은 사과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과를 했다고 할 때, 그것이 사과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귀찮아도 할 수 없다. 사과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하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의료비 120만원 vs 1,200만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