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여럿이서 하는 합법적인 바람

앞에 사람을 붙여 말하는 역겨움에 대하여

by 버켓노트

어릴 때 나랑 '너는 같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주인과 종, 그러니까 절대 다른 감정 없이 공간만 공유할 뿐이다'라는 것을 앞세운 합법적 동거 프로그램이 있었다(동거는 원래 합법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점에서 잘 포장되었냐를 말한 것일 뿐). 하지만 프로그램 중반을 넘어가면 귀신처럼 '어라, 이 녀석 조금 달리 보이네?'라는 전개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는데, 그럴 때마다 뭐가 그리 놀랄 것이라는 건지 방청객들의 나자빠지는 리액션들이 나오곤 했다.


연애 중에 다른 이성과 이뤄지는 모든 것들을 바람이라고 정의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모두가 손가락질할 행위가 있어야 한다. 당연히 같이 모텔방을 들어가야지. 그게 아니면 친구랑 차 한 잔, 영화 한 편, 술 한 잔도 단 둘이 못하나?


다르다와 틀렸다를 구분할 수 있는 어휘력은 갖고 있으니까 확실히 말하자면, 그건 틀렸다.

절대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바람이라는 것이고, 애초에 남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연애 중인 당신의 사람만 동의하면 다른 누가 뭐 라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더 주의해야 할 것은 너의 신념을 남한테 합리화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랑우탄이랑 만난다고 오해할 것도 아닌데 굳이 친구 앞에 '사람'이라는 거름망을 붙여가며 당당하다 어필하는 그 징그러움이 너무 싫다. 네가 맞네 내가 맞네 할 것 없이 자신의 이성 친구관을 인정하는 인정하는 사람을 만나서 연애하면서 남들 시선이 뭐 라건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면 된다.


달리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그 징그러움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매체에서나 이런 류의 화제성은 기본 이상이 보장되니까.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면, TV나 유튜브에 나오는 '우리 결혼했어요'같은 유사연애 프로그램의 조회수가 높은 것은 모두 자기 관리의 기본을 하고, 어디 내놔도 부족함 없는 남녀가 한다. 자기 관리 못하고 살찌고 성격 좋지 않은 남녀가 그런 것을 할 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유사 연애를 하려면 연애 시장에서 총점 10점 중 5점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회사에선 유독 이런 분야에 양심의 가책이 무뎌진다. 맨날 보는 사이인데 어때, 일까지 같이 하는 사이인데 어때라며 불편해하는 연인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기 딱 좋으니까.


나에게는 쟤네 둘이 맨날 붙어 다닌다, 둘 다 애인 있는 걸로 아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여자 동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동기는 요즘 남자 선배와 둘이 커피 마시러 다니는 중에 나와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잦은데, 그럴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지나간다. 나한테 메신저로 하던 새로운 저 남자 선후배가 잘생겼다, 몸 좋더라라던 말이 생각 나서였으려나. 며칠 뒤에 메신저로 '너랑 더 사적인 얘기는 못할 것 같다. 일적으로는 대화하더라도 사적인 연락은 그만하자.'라고 말했고, 돌아오는 대답은 '야, 너 뭐 들은 거 있어?'였다. 내가 자기 남편도 아닌데 뭘 알건 뭐가 그리 불안했던 건지, 들은 게 없어서 다행이다 동기야.


한 명의 연인이 이성에게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재미와 감동을 줄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한 명의 이성에게만 집중할 때에만 볼 수 있는 믿음, 애정, 애틋함이 있다. 가슴을 다 내놓는 옷을 입고 다니며 성적인 농담을 하며 남자사람친구와 살고 있는 유튜버의 조회수가 10만을 넘어가는 것이 내 알고리즘에 뜨는 것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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