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3등급인 서훈을 1등급으로 재조정해야한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0년 시작된 일제 강점기를 끝내고 36년만인 1945년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광복 80주년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펼치며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필자가 사는 안동은 한국 독립 운동의 산실이라고 한다. 이 안동에서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작지만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안동 독립 운동의 산 증인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서훈을 현재 3등급인 건국 훈장 독립장에서 1등급인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상향시키자는 운동이 그것이다.
안동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 유공자로 건국 훈장 등 서훈이나 표창을 받은 사람은 400명 가까이 된다. 표창 받지는 못했으나 경북 독립 운동 기념관 조형물에 이름을 올린 독립 운동가는 1천여 명이 넘는다. 이처럼 많은 안동의 선조가 구한말이나 일제 강점기 때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고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자기의 인생과 목숨을 바쳤다. 이 가운데 '경술국치' (1910년) 이후 혁신 유림의 정신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을 갖고 만주로, 중국으로 망명 길에 올라 무장 투쟁을 기반으로 광복 전쟁에 앞장섰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안동 독립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만주에서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를 세워 군사 훈련을 통해 무장 독립 투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에 올라 국권 회복에 그 누구 보다 앞장섰다. 그의 부인 김우락 여사는 종부의 삶을 뒤로 하고 '신흥강습소' 교생을 뒷바라지하며 조국 해방의 그 날을 기다렸다. '신흥 강습소'는 이후 '신흥 무관학교'로 개칭돼 무장 항일 운동가를 양성하였다. '신흥 무관학교' 생도들은 이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등에서 승리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안동 고성 이씨의 종손이었다.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은 99칸의 대저택으로 전답과 노비 등 수많은 재산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주 선생은 '경술국치(2010년)'로 나라를 잃자 모든 재산을 다 처분하였다. '임청각' 종택은 물론 전답 등 모든 재산을 팔아서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당시 데리고 있던 노비들을 위해 노비 문서를 소각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했다. 일가족은 물론 친척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그는 독립 운동 단체인 '신흥강습소'설치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신흥 무관학교' 등 항일 무장 독립 투사를 양성하는 데 그의 재산을 모두 썼다.
안동 종가에 있으면 종손으로, 종부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지만 그의 선택은 '독립 무장 투쟁'이었다. 1932년 석주의 사망으로 다시 안동 고향에 돌아온 부인과 식솔들이 기차를 타고 예천역에 내렸을 때 초라하기 그지없었다고 집안 사람들이 증언한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신흥 강습소', '신흥 무관학교' 등을 통해 무장 독립 투사를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의 '서로군정서' 총주석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물러나고 2대 대통령 박은식에 이어 3대 수반이 되었다. 석주 선생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 체제는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전환돼 초대 국무령에 올랐다.
광복이후에도 그는 곧바로 대한민국으로부터 독립 투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1962년에 와서 겨우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것이다. 독립장은 현재 주어지는 서훈 가운데 3번째 등급이다. 1등급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며 2등급은 대통령장, 독립장은 3등급, 애국장 4등급, 애족장은 5등급으로 구분된다.
광복 17년이 지난 1962년에서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선생에게 서훈이 주어졌는데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3등급에 책정될 정도로 선생에 대한 대우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또 석주 선생의 유해는 1990년에야 중국 하얼빈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96년에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 요원 묘역에 옮겨졌다.
2016년 문재인 당시 국회의원이 안동 임청각을 찾았다. 안동 임청각을 찾은 그는 임청각 군자정 등을 둘러보고 석주 선생의 독립 투쟁사와 이 집안의 독립 운동사(석주 선생의 부인과 아들, 며느리, 손자 등 12명이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었다)를 듣고 임청각의 복원(성역화)을 약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청각 바로 앞에 1942년 중앙선 철로가 놓이면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기차가 지나다녔다. 임청각은 기차 소음과 진동 등으로 많이 훼손되었고 근처에 있는 국보 '법흥사지 7층 전탑'도 열차 소음과 진동, 분진 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문 의원은 반드시 임청각을 바로 세워 석주 선생의 독립 정신을 되찾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문재인 의원이 대통령이 되면서 지켜졌고 중앙선 철로가 제거되고 임청각이 옛 모습을 되찾는 성역화 작업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놓여있다.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 유공자들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이 기회에 안동 사람들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공적에 대해 재평가와 함께 서훈 상향 조정을 바라고 있다.
혹자가 대한민국의 해방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고 있다. 미국이 준 선물이라고 했던가? 참으로 모르는 소리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해방 전쟁을 위해 무장 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하고 있었다.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는 그럼 무엇이었단 말인가?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전쟁이 아니고 장난이었단 말인가?
세계 2차대전 때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을 당했다.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의 승리로 프랑스도 해방되었다. 그럼 프랑스도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의 선물로 독립하였는가? 레지스탕스의 수많은 희생과 활약은 어디로 갔는가? 프랑스 국민은 레지스탕스 등 게릴라 작전으로 독일군을 괴롭혔고 연합군의 진군에 따라 독립을 쟁취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우리의 무장 독립 투쟁이 프랑스보다 못하단 말인가?
석주 이상룡 선생은 자기 재산과 문중 재산을 모두 팔아 만주로 망명해 무장 독립 운동을 이끌었고 해방 전쟁을 위해 안간힘을 쓰다 순국하였다. 이러한 분의 서훈이 3등급 독립장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도 독립 투사들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말과 행위가 많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러한 언행을 두고만 봐야할 것인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올해 초부터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렸다. 이재명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광복 80주년의 해도 이제 3달밖에 남지 않았다. 이재명 정부는 독립 투사들의 공적을 다시 살펴서 그들이 올바른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3대가 망할 수밖에 없었던 독립 투사들의 후손들을 보살피는 지혜가 이젠 필요하다. 독립 운동 유공자, 민주화 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일이고 미래의 일이다. 온전한 나 자신을 되찾고 우리나라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에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