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5일, 나는 하와이의 오하우 묘지에서 증조부님께 시제를 지냈다. "증조부님, 증손자 창병이가 이제야 증조부님 산소를 찾았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만, 이 마음을 받아주시옵소서." 이 날은 내가 오랫동안 꿈꿔온 순간이었다. 7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마침내 증손자로서 조상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 순간이 나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조상님을 뵙고자 했던 내 염원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성스러운 제사상과 그 특별한 날
증조부님께 올릴 제사 음식을 준비하면서 나는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려 했다. 고국에서 가져온 명태포, 감, 대추, 청하 등을 비롯해, 현지 마트에서 구입한 한국산 배, 사과, 귤까지 담아 차려 올렸다. 또한, 하와이의 특산품인 코나 커피도 준비하여 증조부님께 기쁨을 빌었다. 하늘은 그날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였지만, 시제를 올리는 순간만큼은 신기하게도 비가 멈추고 햇살이 비쳤다. 마치 증조부님께서 나를 반기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매년 증조부님의 기일(4월 3일)에 제사를 지내왔지만, 이날만큼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오랜 시간 동안의 기다림과 고난 끝에, 마침내 증조부님의 묘소를 찾아뵙고 시제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5년간의 여정 끝에 발견한 묘소
증조부님의 묘소를 찾는 데는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처음 묘소에 대한 단서를 잡았을 때, 나는 매일 자료를 뒤지고, 현지의 다양한 기관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간의 노력은 항상 허사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오하우 묘지 275번지 #14라는 정보를 얻고, 마침내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묘소는 도로변에 위치한 비석 없는 자리였지만, 그곳이 바로 증조부님이 계신 곳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묘지는 수십 미터 높이의 야자수와 오래된 나무들로 둘러싸인 아늑한 언덕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증조부님께서 평안히 계시리라 믿었다.
아버님께서 생전에 남기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증조부님 묘소를 꼭 찾아야 한다.” 아버님이 남겨주신 오래된 흑백사진과 그 당부는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서 있었다.
조상을 찾아가는 험난한 길
2019년12월, 나는 아내와 함께 하와이를 처음 방문했다. 이때부터 증조부님의 묘소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한국 교민회, 이민청, 정부 문서 관리소, 하와이대, 한국 대사관 등을 방문하며 자료를 수소문했지만, 남아 있는 기록은 거의 없었다. 두 번째 하와이 방문은 2020년에 이루어졌고, 이때는 하와이대 한국학센터에서 증조부님의 1950년 장례식 관련 신문 스크랩을 얻었다. 그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증조부님의 묘지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2023년 세 번째 방문에서야 묘지의 위치를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감격의 눈물이 쏟아졌다. 비록 비석은 없었지만, 그곳이 바로 증조부님이 계신 자리임을 내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나에게 큰 의미를 가졌고, 증조부님의 존재를 몸소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묘지에서의 약속
묘소 앞에 서서 처음으로 증조부님께 절을 올렸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비석이 없는 빈터를 떠올리며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증조부님, 비록 늦었지만, 조상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저의 마음을 받아주시옵소서. 후손들이 증조부님을 기억하며 자주 찾아뵐 것을 맹세합니다.” 며칠 동안 다시 묘지를 찾아가 커피와 맥주를 올리며 작별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비석을 세우고 증조부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리겠다고.
깊은 성찰과 가족의 뿌리를 찾아서
증조부님의 묘소를 찾는 여정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뿌리를 찾고, 조상님의 고난과 헌신을 되새기는 과정이었다. 증조부님께서 하와이에 도착한 후 겪으셨을 고난과 조국 독립을 위한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묘지의 흙 한 줌을 가져가 증조할머님 산소에 뿌리며 두 분의 영혼이 연결되기를 바랐다.
앞으로 매년 이곳을 찾아 증조부님께 예를 올릴 것을 다짐했다. 후손들에게도 조상의 뜻과 헌신을 전하며 이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할 것이다. “증조부님, 이제야 뵈러 왔습니다. 늦었지만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73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증조부님과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증조부님의 묘소를 찾는 여정은 단순한 과거 복원이 아니라, 가족의 뿌리와 조상의 고난을 되새기고, 후손으로서의 책임을 다시 한번 일깨운 소중한 경험이었다. 73년 만에 찾아뵈었지만, 그 과정에서 조상과 후손 간의 연결이 깊어짐을 느꼈다. 앞으로도 나는 증조부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을 후손에게 전하며 그 역사 속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