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X. 3.17.
일요일 뿐인 인생은 재미가 없다
대문자로만 된 책은 읽기 어렵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그래그래 토닥토닥
휴......
그래도 우린 아직 젊고 건강하니까!
살다 보면 좋은 날 오겠지.
라며 위로하고 참는다
밤늦게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의 축 처진 어깨.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예정 없이 급하게 잡힌 1박 2일 부산 출장.
혼자라면 이런 일 감내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처자식이 뭐라고.
나라님도 구제 못하는 가난
우리도 언젠간 이별하는 날 오겠지.
미대오빠는 순수미술을 전공했지만
졸업 전부터 상업미술계에 발을 디뎌
영상 미술 쪽의 일을 하고 있었다.
201X년.
부산에 영화를 찍으러 왔다 했는데
영화만 찍고 가지 뭣한다고 나를 만나
연애를 걸고 결혼까지 한 건지!
그 영화는 미대오빠의 경력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천만 영화였고
나는 그의 행운의 여신이 되었다.
나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미대오빠는
영화미술 일을 하며 영화판을 누볐고,
그 경력으로
결혼 후에는 처자식을 위한단 이유로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드라마판으로 옮겨갔다.
JTBC,채널A, MBN 등 종편이 개국 할 즈음이이라
일이 물 밀듯 쏟아지는 듯 보었다.
그러나 급성장을 기대했던 종편 드라마의 성적은 부진했고
시사, 뉴스 등의 비중이 늘면서
드라마 편성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
눈에 띄게 일감이 없어진 미대오빠의 회사도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일 주, 이 주 조금씩 늦어지던 급여가
어느새 한 달, 두 달이 미뤄지며
더이상 그곳에 출근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미대오빠가 매달 제 목숨 값으로 벌어오는
많지도 않은 월급을 알뜰히 쪼개가며 살았지만
늘 급여일이 가까워오면
바닥을 보이는 통장 잔고를 고민해야 했다.
돈이 떨어질수록
예민해지고 짜증이 느는 내게
미대오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혼자서는 석 달을 쉬어도 넉 달을 쉬어도
다음 일이 잡힐 때까지 버틸 수 있어.
나도 노력 중이니까 그만 좀 쪼아.
쪼은다고 없는 돈이 나오냐."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있는 현재의 우리에겐
매달 나가야 하는 고정비인
전세 대출 이자와 자동차 할부에 더해
각종 경조사비와 육아비용,
먹고 살 한 달 치의 생활비가 필요했다.
나 역시 재택알바를 간간히 하였고,
블로그로 부수입이나 협찬 물품 따위를 얻어
육아용품이나 생활용품 일부를 충당하고는 있었지만
출산과 육아로 제대로된 일을 하지 못하다 보니
우리 가계 경제는
오롯이 미대오빠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미대오빠의 기준에서는
결혼 후 매달 필요한 금액이
미혼으로 혼자일 때의 두 배 세 배가 되다 보니
더 자신 없어하고 힘들어했던 것 같다.
쓸데없이 책임감은 강해서
어지간하면 책임지는 일을 시작도 않는 그에게
처자식을 혼자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은
꽤 견디기 힘든 무거움이었을테다.
그 무게가 미대오빠를 옭아매고 옥죄여
더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미대오빠는
잠시나마 그 힘듦을 회피하고자
밖에서 지낼 건수들에 집착하다시피 했다.
술자리에 불리우면 빠지지 않았고
술자리가 파 할 때까지 남아있다 오곤 했다.
집에 들어오면 돈돈 거리는 아내에
밤낮없이 울고 젖을 찾는 아이가
거슬리고 짜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상황을 견디고 있는 나 역시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부모형제친구 일 고향으로부터 떠나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이 하나만 잡고 버티는 중이었다.
어딘가 하소연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너무 강했고,
무얼 하며 풀기에는 내 주머니 여력이 넉넉치 못했다.
정신적으로 힘든 것을
나는 해도 티 안나는 집안일과
천기저귀를 삶아쓰는 등의 방법으로
내 몸을 혹사시키며 잊어보려 애를 썼다.
자연분만 시 진통으로 인해 아픈 허리,
수유 때문에 삐뚤어져 고통스러운 골반,
잘 나오지 않는 젖을 잘못 빨아 찢어져버린 젖꼭지,
몸조리 없이 움직이다보니 몸조리가 될 리가있나.
특하면 힘이 빠져버리는 손목으로 그릇도 잘 깼다.
임신으로 쪄버린 15킬로의 살은 아이 무게 만큼만 빠졌다.
내 자궁은 여전히 피가 고여있어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녔다.
그래도 신체적 고통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1년에 366일 술자리를 가질 정도로 외향적인 나는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
미대오빠가 아니라면 24시간 내내 말 한마디 할 이 하나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버티다보니
혼자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서
그의 힘듦을 모두 다 헤아려주지 못했다.
그렇게 그때의 우린 따로 또 같이
결핍과 주체 없는 원망에 살았다.
결혼 이후 들숨과 날숨처럼
우리와 가까워진 가난이란 시련.
하나에서 둘, 셋이 된 변화를 받아들여야하지만
자아와 자꾸 충돌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을 견디는 동안이 가장 힘들고 아팠던 것 같다.
참을성이 부족한 내가
입에 송곳을 문 듯 원망과 한탄을 늘어놓으면
무던한 미대오빠도 가끔 참기 어려워할 정도가 됐다.
우리가 서로 감정의 날을 세울 때면
서로에게 말로 상처를 주고 받곤 했다.
가난은 사랑도 창문을 넘어 도망가게 한다던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돈에 대한 욕심이 크게 없었단 것이다.
남편만 집에 일찍 들어오기만하면
내일 먹을 쌀이 없어도
그저 행복해했으니까.
연애 결혼에다, 자존감이 강한 우리 둘.
스스로의 선택을 부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의 선택이 실패였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깔딱 깔딱 매 순간 깔딱고개를 넘는 와중에도
우리는 제법 잘 맞춰가며 산 것인지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은 져버리지 않았다.
그 덕에 결혼 1n 년이 지난 우리는
여전히 손을 잡고 걷고
출근 배웅을 할 땐 입을 맞추고
잠들기 전엔 서로를 보듬어 안으며 살고있다.
넘치는 우리 부부의 애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 부부는 200점이라 불리는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으며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영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