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최근 친구가 사람을 적당히 대하는 방법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고백했다.
"나는 이제야 좀 어른이 되려나 봐."
그녀 입에서 '어른'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속으로만 감춰뒀던 고백을 내뱉어 버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좋은 걸까? 왜냐면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거든."
'어른'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세 가지 뜻이 나온다.
1.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2.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3. 결혼을 한 사람.
나는 왜 어른이 되기 싫을까.
1번 자기 일에 책임을 지기 싫어서?
2번 나이 먹기 싫어서?
3번 결혼하기 싫어서라고 답을 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기에 논외로 둔다.
사전의 정의를 읽다 보니 오히려 나는 어른이 되기만을 오래전부터 바랐던 사람에 가까웠다. 책임은 없지만 마땅히 해내야 할 의무만 수북했던 나의 20대. 서 있는 곳이 출발점인지 도착점인지도 모른 채 달리고 또 달렸다. 마음속에 항상 물음표를 품고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 하며 지냈다. 그래서일까. 빨리 시간이 흘러 내가 주체적으로 책임질 일들이 생겼으면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이를 먹어야 했고, 나이가 먹으면 언젠가 결혼도 하겠지 생각했다.
바라는 대로 30대인 지금의 나는 어른이 됐다. 나이도 먹었고 결혼도 했고 책임질 일들이 매일 쌓인다. 그렇게 바라던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도 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알 수 없다. 달려온 길마다 마침표가 찍혀있을 줄 알았던 발자국도 뒤돌아보니 물음표만 가득하다.
어른이라는 바통만 손에 쥐면 앞만 보고 신나게 달릴 줄 알았는데. 어쩐지 나는 갈수록 달리지도, 걷지도,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지도 못하게 되었다. 발이 묶인 채 동동거리던 어느 날 갑자기 아이 엄마가 되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라는 겉옷을 걸친 어른이 되었다.
겉옷을 걸친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과 완전해진다는 것은 다른 의미임을 말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의연함, 자기 자신을 알고 표현할 줄 아는 단단함, 관계에서의 적정선을 유지할 줄 아는 담백함. 어른의 정의를 나름대로 내린 뒤 비로소 완전해졌다 안도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른이 가진 의연함, 단단함, 담백함을 되돌아본다. 서운하다 말하면 찌질해 보일까 봐 의연하게 괜찮은 척했다. 어른이니까. 더 이상 흔들리기 싫어서 나라는 사람을 변하지 않는 단단한 틀 안에 맞춰두고 지냈다. 어른스럽게. 좋은 사람 앞에선 마음을 식히기에 바빴고, 미운 사람 앞에선 그래도 적당한 온기는 남겨두려 했다. 어른끼리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야 하니까.
아이는 의연하지 못하다. 엄마가 장난으로 아이스크림 한 입 뺏어먹은 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단단하기로 치면 주무르는 대로 변하는 반죽이다. 씩씩하게 미끄럼틀 잘 탈 수 있다 해놓고 막상 앞에 서면 무서워서 못 탄다고 뻔뻔하게 노선을 바꾼다. 관계에서 적정선은 없다. 엄마가 제일 좋다고 뽀뽀 범벅 침 범벅을 해대다가도 수틀리면 당장 이 집을 나가라 명하신다.
의연하지도, 단단하지도, 담백하지도 못한 아이를 키우며 나는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어졌다. 완전함으로 무장한 어른이라는 이름 속에 불완전함을 숨겨두고 살았다. 문득 어린이의 완전무결함이 부러워졌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채우지 못했던 그 어떤 것을 어린이가 채운다. 그 어떤 것이라 하면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자유로움과 같은 것들이겠다. 완전무결한 어린이를 불완전한 어른이 보살핀다. 사실은 누가 누구를 보살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시 정정한다. 완전무결한 어린이가 불완전한 어른을 채워준다. 어른은 그에 대한 대가 혹은 감사함의 표시로 아직은 어린아이를 잠시 동안 보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