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앵두나무 열매와 주목 2

이야기 둘

by 안광근

마흔을 목전에 둔 지금도 나는 주목의 위치를 말해주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의 바람과 날씨 그리고 코끝을 간질댔던 가을 냄새까지도 또렷한데 그건 아마 큰스님의 말처럼 내가 득도를 한 때문일 것이다. 어둠이 번지던 저녁. 산사에 퍼지는 저녁 범종 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다. 아버지가 날 버렸구나.

생각해 보면 그날은 아침부터 뭔가 수상쩍었다. 여름답지 않게 햇살도 적당했고 주말이라 법당도 분주했던지라 목수 삼촌들의 허전하고 쓸쓸했던 표정을 잠시 잊고 있었었다. 쓸 만한 목재를 찾아 나섰던 아버지와 삼촌들은 매서운 겨울이 지나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여름을 보내고 누리와 함께 주목을 찾아 나섰을 때도 돌아오지 않았다. 떠난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의 그리움 따위엔 어차피 관심 없다는 걸 깨우쳤을 때 나도 아버지를 더는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니라 떠돌이 대목수의 아들로 살았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현장에선 목수들의 등에서, 겨울이면 술집 여인들의 보살핌으로 자란 나였다. 말을 떼면서부터 전부 삼촌과 이모가 되었는데 객지 생활이 고달파 그랬는지 아버지의 눈에 들려 그랬는지 모두가 날 제 조카인 양 예뻐했다. 모자람 없이 사랑받아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그때만 떠올리면 난 아직도 그 많던 삼촌과 이모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무장무장 그리워지곤 한다.

아버지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9살 생일 무렵이었는지 설날 며칠 전이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는데 앞마당 3층 석탑이 반도 넘게 파묻혀 “와”하고 탄성을 질렀던 기억은 아직도 어제처럼 선명하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눈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해가 뜨자 눈이 곧 그쳤지만 내 키보다 족히 몇 뼘은 높게 쌓여 스님들이 치울 엄두도 못 내고 빼꼼히 길만 낸 채 점심 공양을 마쳤을 때였다. 수북이 쌓인 눈에 햇빛이 반사돼 미간을 찡그렸던, 요사채 지붕에서 때까치가 울고 내 팔 길이보다 더 긴 고드름이 처마 끝에서 조금씩 녹아내리던 그때 아버지가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왔다. 근데 낯설기만 했지 하나도 반갑지가 않았다. 서로 멀뚱히 서 있기만 하다 아버지는 팔을 벌렸고 나는 뛰었다. 뛰면서도 내가 왜 뛰는지 몰랐고 도착해서는 안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주춤대다 결국 어정쩡한 꼴로 안겨버리고 말았는데 그건 순전히 낭만적으로 내렸던 눈 때문이었다. 왠지 안겨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아버지는 딱 이틀을 머물다 떠났는데 난 9살이었던 관계로 주목을 보고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진짜 나무가 말을 했는지 물었고 아버지는 그때도 “당연하지”라며 이틀 내내 그곳으로 가는 길과 즐거움과 신비함에 관해서 얘기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주목에 관해 물은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운사에 머물면서는 아버지를 대면하는 게 일 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었고 12살이나 13살까지는 비밀로 해야 했으며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산사를 떠나 자취를 시작해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가 어쩌다 자취방에 찾아왔지만 자고 가진 않았으며 20살이 넘어서는 그마저도 뜸해 언젠가는 다섯 해 만인가 여섯 해 만에야 얼굴을 본 적도 있었다. 너무 뜸하다 싶어 한 번 찾아가겠다고 하면 아버지는 매번 일이 끝나 현장을 곧 옮길 거라며 자신의 거처는 말해주지 않았다. 결국,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비운사를 떠난 뒤로 아버지와 같이 한 지붕 아래 누운 적이 딱 한 번밖에 없었는데 그 한 번의 밤이 내가 안나푸르나 등반대원으로 뽑힌 날이었고 아버지는 스키장 건설 반대로 뉴스에 출연한 날이었다.

“지름 이십 센치가 넘는 철쭉나무는 대한민국에 갈왕산밖에 없을 겁니다.” 모자를 푹 눌러 써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아마 아버지인 줄 몰랐을 것이다. 단 사흘 열리는 올림픽 활강 경기를 위해 500년 원시림을 파괴한다는 건 죄악이라며 나무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잠도 안 온다던 아버지의 인터뷰는 절박하고 의연했다. 500년이 훌쩍 넘은 주목과 100년이 넘은 철쭉과 아름드리 올벚나무와 물박달나무가 빼곡한 숲의 기억은 내게 13살까지가 전부였다. 아버지의 말을 믿었고, 믿고 싶었고, 믿어야 했으므로 산앵두나무 열매가 익어가는 계절마다 나는 길을 나섰지만, 나무는 매번 말이 없었다. 울부짖는 소리를 진짜 들었는지 묻고 싶었다. 아버지의 거처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내가 아버지를 찾아 나선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갈왕산 초입에서 중봉으로 가는 길은 승용차가 올라갈 수 없었다. 차에서 내려 전화를 걸자 아버지는 늘 그렇듯 무심한 말투로 별일 없는지 묻는 게 전부였다. 내가 어딘지 묻자 또 늘 그렇듯 현장을 옮길 거라며 일간 한번 보자는 말로 대화를 끝냈다. 전화를 끊고 한 시간쯤 걷자 길을 막아선 천막이 나타났고 그 앞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솔직히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게 너무 어두웠고 너무 머리숱이 없었고 너무 야위고 늙어 아버지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저기요”하며 다가서다 천막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아버지인 줄 알았다. 무슨 천막을 길 한가운데 쳤냐는 타박과 포클레인이 못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라는 대꾸가 안부의 전부였다. 반갑다거나 혹은 이게 얼마 만이냐는 말은 서로 하지 않는 게 그나마 어색함을 면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운사를 떠난 후 처음으로 아버지와 하룻밤을 보냈다.

목수를 잠시 접고 녹색연합 활동가들과 지내는 건 당연한 이치와 섭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수백 년 넘은 나무가 훼손되면 고스란히 수백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어떻게 스키장 건설을 받아들일 수 있겠냐며 나무를 다루는 사람에게 그건 숙명 같은 거라고도 말했다. 그리곤 흘리듯 얼버무렸다. “주목도 베어질지 모르고······.” 7살 자식을 산사에 버려두고 떠난 아비의 입에서 나올 소린 아니었다. 다만 그날 일을 따지지 못했던 건 아버지가 너무 늙고 초라해 보여서였다. 어쩌면 부질없는 희망이나 자존심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버려진 게 아니고 나무가 정말 말을 했다면······.

안나푸르나 등반대에 뽑혀 네팔로 떠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상공략에 또 실패할 수도 있었고 떠나려면 일 년쯤 남았으며 그 전에 한 번쯤은 만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도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날 찾아왔다. 안나푸르나 정상에 태극기를 꽂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들의 영역에 침범한 대가는 혹독했다. 하산 길 눈사태로 셰르파 두르바와 등반대장 영석이 형이 실종됐고 나는 한쪽 팔이 부러졌다. 예보에 없던 눈이 내렸고 통신도 두절 됐다. 밤이 찾아왔을 때 나는 직감했다. 여기까지구나. 온몸에 감각이 없어지자 숨쉬기가 한결 수월했다. 환각의 상태로 접어들었는지 모든 게 편해지자 뜬금없이 시큼한 산앵두나무 열매가 먹고 싶어졌다. 우리 부자의 인생은 왜 그리 촉촉하지 못하고 늘 건기였을까. 앙금을 남겨둔 채 떠나온 게 못내 아쉬웠다. “내 목소리 들려?” 졸음이 밀려오자 환청까지 들렸다. “내 목소리 들리냐고?” 어찌나 맑고 또랑또랑한지 난 환청이란 걸 알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어······들려.”

“다행이다. 까실쑥부쟁이와 바위채송화 길을 지나면 어디로 가야 하지?”

가을만 되면 오르내렸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찌나 반갑던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솔이끼가 깔린 너덜길로 가야지.”

“흰 송진이 흘러내리는 분비나무 군락에선?”

“오른쪽으로. 계속 걷다 보면 목이 마를 거야. 그럼 사스래나무 옆길로 쭉 내려가. 거기 옹달샘이 있으니까.”

“아는구나. 그 샘물 맛 최고지. 거기서 넌 어디로 갈 건데?”

“사스래나무까지 다시 올라갈 거야. 가던 길로 조금만 더 가면 산앵두가 엄청 열려 있거든. 새콤달콤한 게 얼마나 맛있는데. 난 머루나 다래보다 산앵두가 좋더라.”

“맞아. 그 맛을 어떻게 잊어. 한겨울에 속이 매스꺼울 때마다 그게 얼마나 먹고 싶던지. 나도 머루나 다래보다 산앵두가 좋더라.”

“너 나무야?”

“아니.”

나는 8살 아이였고 또랑또랑한 소리는 나무가 아니라고 했다. 몽롱한 정신에 밤새도록 그렇게 얘기를 나누다 발아래 깔린 구름 사이로 해가 삐쭉이 솟아오르는 걸 보며 꿈이거나 환각이거나 그도 아니면 죽음으로 가는 길목 어디쯤이라고 여겼는데 놀랍게도 현실이었다. 살았구나. 기운을 차려 얼마나 내려갔을까. 헬기가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내가 죽었다는 보도가 뉴스에 나갔다는 건 한국으로 후송되고 나서야 알았다. 정상등반의 대가로 동상 걸린 발가락 몇 개가 잘려나갔다. 병실로 찾아온 아버지는 자기 팔자에 낀 겁살 때문에 내가 그리됐다고 자책하더니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산에는 뭐 처먹을 게 있다고 자꾸 기어 올라가고 난리야.” 그러고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살았으면 됐다며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애초에 기대 같은 게 없었으니 서운하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단지 잘려나간 발가락이 자꾸 근질거려 짜증이 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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