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 뭐 갖고 싶어?' 하는 질문에 나는 대부분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알면서!' 돈보다 시간을 중요시하는 이 사회에서 나는 꽤나 차분한 것을 원했다. 정성 가득한 포장마저도 전부 남의 것을 카드결제하는 요즘이기에.
편지는 온전히 그 사람만을 생각하며 보낸 시간을 선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래전 멀리 떠나 버린 초등학교 친구가 준 선물 같은 게 내게 남아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친구가 아무 생각 없이 휘갈겼을 편지는 과거에 살던 그 이름도, 고소한 버터향을 닮은 숨결도 전부 살려 두었던 거다. 나를 짓누르는 시침의 무게에 쥐가 날 때면 나는 한 번도 옆자리에 앉은 적 없던 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그러면 단숨에 시간의 바깥에 사는 내가 그날로 돌아가는 듯한 바람이 분다. 이 모든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양탄자는 지금도 방 한 구석에 잠들어 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 친구의 글씨를 안고서.
편지는 제 안에 전주인의 정보를 잔뜩 욱여넣은 채로 허리를 접는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껍질을 살살 벗기면 나는 어김없이 종잇장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를 부담스럽게 훑어내린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연 글씨다. 글씨는 시간의 범주가 허용하는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 그가 편지를 쓰는 동안 들숨에 어떤 생각을 떠올렸으며 날숨에 어떤 생각이 스러졌는지와 같은 앙큼함을, 그리고 글을 쓰며 수없이 바꾸었을 그 사람의 표정까지도 꼭꼭 숨긴다. 그 사람의 어투에는 그의 성향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겹겹이 발린다. 누군가의 글자가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아무리 쥐먹은 글씨일지언정 그 사람이 사랑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굴복해 마지않는 사실이지만, 나는 그런 면에서 지나치게 취약한 듯하다. 아주 드물게는 물처럼 녹아 흐르는데 ㅡ 아, 그럴 때면 나조차도 속수무책이다.
누군가 이런 나의 감상을 보고 변태적인 취미라 부를지도 모르겠다마는, 쓰는 이가 어지러운 발자국을 잔뜩 찍어놓은 것을 가만둘 만큼이나 내가 점잖은 사람은 아니니 별 수 있겠는가. 과거의 영원에 멈춰 버린 그의 흔적을 수집하는 일은 꽤나 재미있다. 유난히 향기로운 편지는 읽는 이의 눈가까지도 미지근한 물기로 가득 적신다. 진득한 눈결에 다만 부끄러워 종이는 파르르 몸을 떤다. 투명한 미소가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