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고미숙 외 『나이듦 수업』
“사람이 잘 산다, 건강하다, 양생을 한다는 건 내 몸과 이 시공간의 리듬을 맞추는 거예요. 봄에는 봄에 맞는 양생을, 겨울에는 겨울에 맞는 양생을 해야 합니다. 청춘은 청춘에 맞게, 중년은 중년에 맞게, 노년은 노년에 맞게 리듬을 밟아야 되는데 이 리듬이 어긋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지금 중년인데 아직 마음이 소녀야, 이게 아름답습니까? 그런 아줌마를 보면 주변 사람들은 미쳐 버립니다.”(p.27)
“이젠 이렇게 조용한 곳이 좋으니
진짜 나이를 먹나 보네요.”
“시도 때도 없이 느끼는
그놈의 나이 듦. ㅠㅠ”
지난주 다녀온 노지 캠핑장은 딴 세상처럼 고요했다. 카톡으로 풍경 몇 컷을 지인에게 보낸 후 "다음에 함께 와요"라는 말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 그놈의 나이 이야기. 짜증 섞인 듯한 그녀의 답에 잘못 건드렸다는 걸 알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흠칫했지만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빠르게 태세전환을 했다. “그러게요. 이제 나이를 인정할 때도 되었는데 말입니다요.”
50대 초반인 내가 50대 중반인 그녀를 만나면 요즘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 한 번뿐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돌림노래를 한다. 짐작했겠지만 짐작은 역시나 맞다. "나이 들어서 그래."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뭔가를 자꾸 잊어버려도 이 말 하나만 들이대면 끝이다. 전에는 하지 않았던 실수들을 털어놓으며 나이 들어서 그런 거라며 서로의 죄(?)를 사해 준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이 말 앞에선 모든 게 용서가 된다. 그런데 누가 이런 자격을 주었지?
그녀와의 대화에서만 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이 말은 무한증식 중이다. 독서 모임, 탁구장, 친목 모임, 친정 모임을 가리지 않는다. 40대 동생들과 하는 독서 모임, 20-30대, 40대가 섞여 있는 탁구장에서는 나이 들었다는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써 자중한다. 하지만 나보다 연배가 있는 언니들 앞에서는 거리낌이 없다. 50대 후반, 60대인 언니들도 만만치 않다. 서로가 서로의 나이 듦을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안 아픈 데가 없어. 요즘에는 안 먹던 약도 먹잖아.” “참 나, 모임 장소가 아닌 곳에서 기다린 적도 있잖아.” “바지 수선을 하러 갔는데 머릿속은 분명 늘려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줄여달라고 했다는 거야.” 어느새 누가 더 최강인지 겨루는 베틀로 이어진다. 최강자가 가려진 다음에야 끝이 난다. 한바탕 함께 웃어젖히고 나서야 끝이 난다. 우린 다 이렇게 살고 있다고 서로가 서로를 안심시키고 있는 중인 걸까?
한 번은 두 살 차이가 나는 49살의 여동생과 “나이 들어서 그래”라는 베틀을 친정엄마 앞에서 벌이다 된통 혼이 났다. “아이고, 칠십 먹은 엄마 앞에서 참 잘들 한다.” 나이도 어린것들이 그러고들 있으니 얼마나 기가 차셨을까? 당시에는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했지만 까맣게 잊고 무심코 이야기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이 말이 내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이 말이 나한테 꼭 붙어서 떠나질 않는다. 갓 50이 되었을 때도 안 하던 말을 지금에서야 부쩍 하고 있는 건 왜일까? 얼마 전 인지심리학자인 김경일 교수의 강의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2045년까지 죽지 않으면 죽지 않는 시기(Immortal Period)가 올 수도 있어요. 120에서 140살까지 사는 최장수 모드가 왔어요.” 아니 뭐라고요? 50에도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변화를 힘들어하는데 앞으로 살 날이 그렇게나 많이 남았다고요? 심지어 안 죽을 수도 있다고요? 최소 100살이라 쳐도( 물론 중간에 죽을 수도 있지만) 50년은 더 살아야 하니 이 마법의 말을 50년 동안이나 반복하면서 살 순 없다.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사람으로 살다 생을 마감할 순 없지 않은가? 강의를 들은 후 마음은 그렇게 더 착잡해졌다.
이게 다 그놈의 고령화 때문이다. 그냥 고령화도 아니고 초고령화라고 한다. 현대 나이 계산법이라는 것도 등장했다. 본인 나이에 0.8을 곱해서 나온 나이로 살아야 한단다. 30대 같아 보이는 50대, 40대 같은 60대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마치 그렇게 사는 삶만이 멋진 삶인 양 모든 미디어가 앞다투어 보여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51살이니까 0.8을 곱하면 40.8살이 된다. 분명 10년이나 젊어졌는데 현실은 왜 정반대일까? 이유 없이 여기저기 아플 때도 있고 하루가 다르게 몸이 변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때도 많다. 전에는 입에도 안 대던 음식을 건강한 음식이라며 먹기 시작했고 시끄러운 곳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서 그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내게 사회는 여러 매체를 통해 표현 방법만 다를 뿐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한다. “현재 나이로 계산하면 네 나이는 40살이야. 시대에 부응하란 말이야. 젊고 활기차게 살아야지.” 오늘도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다. 몸은 점점 나이 들어가고 있고 이런 변화를 인정하는 것도 버거운데 자꾸 젊게 살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반항심이 치밀어 올라 이런 말을 마치 주문처럼 외우면서 철벽을 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이듦 수업』에서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잘 산다, 건강하다, 양생을 한다는 건 내 몸과 이 시공간의 리듬을 맞추는 거예요. 청춘은 청춘에 맞게, 중년은 중년에 맞게, 노년은 노년에 맞게 리듬을 밟아야 한다.” 내 몸은 50대인데 자꾸 30대, 40대의 시공간에 리듬을 맞추려고 하니 부대껴서 자꾸 나이 이야기를 하는 건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나이듦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이 말을 하면서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고령화사회에서 청춘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력도 버겁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몸과 마음의 변화 또한 두렵고 낯설다. 노화라는 낯선 손님 때문에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사회는 내게 40대의 시공간에 리듬을 맞추라고 요구한다. 이중고도 이런 이중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