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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필사 문장의 주인인 그녀들을 만나다

(일상의 말들)

by 하늘

어떤 일은 아주 우연히 아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북 토크를 위해 이른 아침 3시간 가까이 달려 찾아간 국제 도서전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1954년부터 지금까지 70년 가까이 출판사, 저자, 독자가 한 자리에서 만나는 가장 큰 축제라는데 10년 넘게 책을 읽어온 나는 왜 처음일까?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런 세계가 얼마나 많을까? 500개가 넘는 출판사의 부스도 부스지만 출판사별로 길게 줄을 서 있거나 책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은 신기하고 놀라웠다.


독서를 하나의 놀이처럼 즐기는 문화인 ‘텍스트힙’을 바로 눈앞에서 보다니! 이런 젊은 독자층을 겨냥한 것인지 출판사들도 개성과 취향이 가득한 감각적인 부스와 굿즈들을 통해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게 항상 책은 무겁고 진중한 그 무엇이었는데, 밝고 경쾌한 도서전의 풍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책이라는 게 꼭 무겁기만 해야 해? 너는 책을 너무 무겁게만 대하는 것 같더라. 과도한 의미 부여에서 좀 벗어나. 너는 가벼워질 필요가 있어.” 책은 공부라는 관념이 머릿속에 뿌리 박혀 유연하지 못한 내게 독서를 놀이처럼 즐기는 그들은 한없이 부러운 존재들이었다. 아! 나도 가벼워지고 싶다.


여느 때의 나라면 종일 출판사 부스를 돌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겠지만 생애 첫 북 토크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빠른 걸음으로 후다닥 전체적인 분위기만 살피고 도서전 한쪽 끝에 마련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는 자연스러운 북 토크를 위해 질문지를 주지 않는데 편집자님께 처음이라 너무 긴장된다고 간곡히 부탁드려 미리 질문지를 받았다. 답변을 채워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더 큰 문제는 글과 말의 괴리였다. 글은 글이요 말은 말일진대, 글을 가지고 말을 하려니 삐걱거리고 입에 붙질 않았다. 글을 말로 바꾸는 수정에 수정을 거쳤지만 부자연스러움은 여전했다. 달달 외운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려면 자체 리허설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도서전 한구석에서 파란색 볼펜으로 여러 번 수정한 티가 역력한 원고를 한쪽 손에 든 채, 한 번은 편집자가 되어 묻고 한 번은 내가 되어 답하는 1인 2역을 번갈아 고 있었다. 마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오물오물 우물우물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 한겨레 출판사 부스에서 직원 한 분이 소리쳤다. “김금희 작가님 사인회가 있습니다.” 아니, 뭐라고? 눈을 부릅뜨고 작가님을 찾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상에서 보았던 그분이다. ‘어, 안 되는데. 연습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이미 자리를 박차고 작가님의 신간 『나의 폴라 일지』을 들고 줄에 합류해 있었다.


그녀의 책 중 『경애의 마음』을 필사한 적이 있는데, 필사한 문장들 중 마음에 품고 사는 문장이 있다. “일상은 그렇게 나아지다가도 구겨지고 다시 망가지곤 했는데.” 원래 일상은 그런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원래 인생은 그런 거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되었다. 매일 나아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데도 그런 날들을 꿈꾸며 사는 내게 필요한 문장이었다. 구겨지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하는 날들을 조금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 문장이라 좋았다. 일상은 물론 인생 또한 이 세 가지 사이클로 돌고 도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다.


마음에 품고 사는 문장을 쓴 작가님을 직접 만나다니!

“작가님 책 너무 좋아해요. 저도 첫 책 낸 초보 작가라 오늘 북 토크 해요.”

“아! 그래요? 축하드려요. 어떤 책이에요?”

“탁구 에세이요.”

“탁구 에세이요? 신선하네요. 북 토크 잘하시고요.”

함박웃음으로 그녀와 사진 한 장을 찍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필사를 하고 필사한 문장을 일상에 녹이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필사 문장의 주인을 직접 만났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다만 갑작스러워 이 말을 못 한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경애의 마음』에 나오는 ‘일상은 나아질 수도, 구겨질 수도, 망가질 수도 있다.’라는 문장을 정말 좋아합니다. 작가님. ” 그녀의 문장이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는 걸 알려주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다행히 외운 티가 나지 않고 처음 한 것치곤 자연스러웠다는 북 토크가 끝난 후, 도서전을 다시 돌아볼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평소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하기에 출판사 ‘제철소’부터 들리기로 했다. 아! 그런데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가끔 ‘내 글쓰기의 롤모델은 누구일까?’ 스스로에게 물을 때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작가 은유. 『쓰기의 말들』이라는 책에서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 길지 않은 글임에도 밀도 있는 문장들과 그 안에 담겨있는 사유의 깊이에 반했다.


“글쓰기를 독학으로 독서를 통해 배웠다. 다독가라기보다는 문장 수집가로 문장을 탐했다. 문장 단위로 사고한 덕에 직관이 길러졌다.”라는 그녀를 통해 평범한 주부인 나도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글쓰기를 독학으로 독서를 통해 배우는 것도, 필사 문장을 수집해 필사 문장 단위로 사고하면서 필사한 문장을 일상에 녹이는 글을 쓰는 방식도 그녀의 영향이다.


그렇게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내게 끼친 그녀가 『아무튼, 인터뷰』라는 신간을 내고 사인을 하기 위해 서 있었다.

“작가님, 제 롤모델이세요. 작가님 책 집에 다 있어요. 저도 이제 막 첫 책을 낸 초보작가예요.”

“아! 그래요? 축하해요. 무슨 책이요?”

“탁구 에세이요.”

“아무튼 탁구 같은 거군요.”

“네, 맞아요.”

갑작스러운 만남에 사진 찍는 것도 잊고 부랴부랴 인사를 하고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는 발걸음에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내가 만난 그녀가 은유 작가님 맞나?


필사 문장의 주인인 그녀들을 만났다. 그녀들의 수많은 문장들은 내가 좋아하는 필사라는 행위를 통해 내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 그러니 나의 첫 책 어딘가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분명 그녀들의 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내가 그녀들의 문장을 통과하면서 글을 쓰고 첫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걸 모른다.


사실 김금희 작가님과 은유 작가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감히 면전에서는 쑥스럽고 부끄러워 말할 수 없었다. “작가님의 문장을 통과한 사람 하나가 작가님의 문장 덕분에 책이라는 걸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어요. 지금도 작가님의 문장을 마음에 품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작가님들께 첫 책 낸 걸 굳이 이야기한 이유도 사실은 ‘제가 작가님 문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이렇게 책을 냈답니다.’라는 무의식의 발현이었던 것 같다.


내게도 내가 쓴 문장을 먹고 자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으로도 수많은 문장들을 내 몸에 통과시키는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문장들은 이렇듯 한 사람에서 한 사람으로 흐르고 그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흐른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문장들이 이러한 순환방식의 산물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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