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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필구 Nov 09. 2022

응급실의 노부부

마음

코로나 시국이다. 2019년 말부터 유례가 없는 엄청난 힘으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이름은 코로나가 되었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대제국을 건설했던 어떤 정복자의 카리스마보다 더 빠르고, 강력하게 세상을 휩쓸고 전세계의 정치, 경제, 인구, 문화 등을 그 발아래 두고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낯선 것에 대한 적응은 천천히 조금씩 녹아들듯이 해야지 부작용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코 시국은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적응하고 바뀌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일선에 선 자들의 몫인 것이다. 그리고 최일선에 선 그들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적응할 수 있도록 코로나와 현실의 삶의 간격을 조금이라도 벌리는 것이다. 그 간격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이지만 소중한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각종 매체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청정구역이었던 우리나라는 우리만은 이 사태가 피해 가기를 하며 불안한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의 확진자가 보도되고 난 후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어느 날부터 모든 출동에 감염 보호복을 입으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지금이야 메뉴얼이 갖춰지고 모든 일에 익숙해졌지만, 처음 막 일이 터지기 시작할 때는 우리 스스로도 급변하는 태세에 시시때때 적응을 해야 했기에 시스템의 불안정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집에는 산모가 있던 나로서는 '확진자 이송'이라는 출동 지령서를 받을 때마다 추운 날씨에 옷이 벗겨진 채 밖에 나온 사람과 같이 몸이 벌벌 떨렸다. 솔직히 정말 두려웠다. 나 때문에 뱃속의 아이와 아내가 감염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나칠정도로 나의 모든 몸을 봉인했고,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조금의 틈만 보여도 테이프를 칭칭 감았다. 환자를 이송하다가 땀 때문에 마스크나 고글이 미끄러져 밖의 공기가 조금이라도 들어오면 그날은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골로 들어가 차 안에서 잠을 자고 출근을 하는 날이 많았다. 그때의 불안함은 나의 마음을 지치게도 했지만,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후로 약 2년이 좀 넘게 흘렀다. 여전히 코로나 시국이다. 그때만큼 세상의 분위기가 살벌하진 않지만 여전히 코시국이다. 지금도 매일 확진자를 이송하고, 그들을 캐어한다. 지금은 확진이 뜨면 대부분 집에서 약을 먹고 격리 기간이 끝나면 다시 밖으로 나오는 시스템이지만, 노약자들에게는 여전히 코로나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신고가 들어온다. 호흡이 힘들고, 가래 때문에 먹을 것을 못 먹겠다. 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등의 내용이다. 얼마 전에도 할머니 한 분이 호흡이 힘들다고 남편 분이 신고를 하셨다.

 현장에 도착하니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계셨고, 한쪽으로 누우신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양 눈썹은 여덟 팔자처럼 양끝이 내려가 있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주길 기다리시는 거 같았다. 할머니는 코로나 격리가 해제된지 하루가 지나신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코로나를 겪으신 할머니가 평소보다 더 힘들어하시니 걱정이 더 많으신거 같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처음 코로나가 기승을 부렸을 때의 내가 떠올랐다. 임신한 아내가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안좋거나 기침을 하거나 하면 코로나때문에 저러나 해서 온종일 체온계를 아내 귀에다 달고 살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생각보다 열은 높지는 않았다. 다만 숨 쉬기가 힘들다고 하셨다. 우리는 할머니를 이송하려고 구급차에 태웠다. 하지만 역시 병원 선정이 쉽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규모가 중간크기 정도의 병원에서는 할머니의 호흡이 불안정하므로 대학병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모든 대학병원에는 환자 과밀화로 수용 자체가 어려웠다. 계속해서 병원을 알아본 후 우리는 20km 정도 떨어진 대학병원으로 할머니를 이송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환자가 너무 많아서 우리는 병원 응급실에서 대기를 해야 했다. 대학병원의 응급실에 대기를 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나의 앞을 스쳐 지나다녔다. 대부분이 노인분들이었다. 노인의 보호자는 노인이었다. 그날은 유독 할아버지의 보호자로 할머니, 할머니의 보호자로 할아버지가 많았다. 평일이어서 자식들이 병원에 오지 못한 건지 두 분들 중 한 분은 응급실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셨고, 또는 옆에 나란히 앉으셔서 손을 꼭 잡아주고 계셨다. 몸이 안 좋으신 대부분의 노인분들은 말씀하시는 것을 불편해하셨다.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보호자들은 금세 알아채고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마치 모든 환자와 보호자가 엄마와 자식 같아 보였다.

그때였다. 휠체어에 타고 계신 할아버지 한 분이 화를 버럭 내셨다. 왜 화를 내신 건지는 할아버지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팔짱낀 채로 앉아 계셨고, 마스크를 내리고 계셨다. 난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할머니가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은 어떤 단호함이라고 해야하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성격이 보통이 아니실 것 같던 할아버지는 화를 버럭 내시면서도 팔짱을 낀 팔을 절대 풀지 않으셨고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분노를 분출하셨다. 병원 직원이 다가왔다.

"할아버지 응급실에서 소리 지르시면 다른 분들에게 피해가 가요. 그리고 마스크도 좀 올려주세요. 어르신도 위험하지만, 어르신이 마스크 내리고 계시면 다른 분들도 불편해하세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리고 할아버지 뒤로 돌아가 할아버지 턱에 걸려있던 마스크를 귀로 올려주셨다.

난 생각했다.

'왜 할아버지가 직접 마스크를 올리지 않으시지? 저 정도로 평생 할머니에게 대접받으셨나?'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마스크를 다 올리시더니, 할아버지의 등 뒤에서 할아버지를 꽈악 안아주셨다. 굉장히 낯선 모습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나의 눈에는 마치 그순간에 시간이 멈춘 거 같아 보였다. 한순간이지만 시끌시끌하던 응급실이 잠깐 조용해진 거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물론 그건 나의 기분이었겠지만 말이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반전이 드러나면서 주인공들 주변으로 카메라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주변의 보조출연자들이 포커스 아웃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뒤에서 꼭 껴안은 지 5초 정도 되었을까? 할아버지의 팔짱이 스르르 풀렸다.

할아버지의 한쪽 팔이 힘없이 파르르 떨리고 계셨다. 뇌경색의 후유증을 앓고 계신 듯했다.

할아버지는 떨리는 팔을 자신의 무릎에 내려놓으시고는 떨리지 않는 한쪽 팔로 할머니의 손을 잡으셨다.

할머니의 말은 명확히 들을 수 있었다.

"여보 힘들지만 마스크 하고 계세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끄덕하시고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던 손으로 마스크를 왼쪽 오른쪽 정리하셨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시며 시야를 확보하셨다. 그리고는  처음의 그 답답해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셨다.

 짐작으로는 할아버지가 응급실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실내에서 아무것도 못하시고 오랫동안 마스크를 하고 계시니 답답한 마음에 빨리 좀 봐달라고 마스크를 내리시고 병원 관계자들에게 화를 내셨던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두분 부부를 보다가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우리가 이송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향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뒤척일 때마다 조금씩 할머니의 몸과 어긋나는 이불을 계속해서 할머니 쪽으로 정리하셨다. 할머니는 계속 조금씩 움직이셨고, 할아버지는 정교하고 예민한 센서가 달린 기계처럼 계속해서 말없이 이불을 정리해 주시고 계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연세를 보았을 때 그 두 분은 이제 그들의 부모님이 그들을 보아왔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왔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는 것과는 또 다른, 부부가 서로에게 주는 손길은 부모가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보다는 서로를 향한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이고 공존하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특별한 인연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장 큰 애틋함을 보이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응급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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