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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필구 Nov 13. 2022

나를 외치다

새로운 시작

가수 마야의 노래 중에 '나를 외치다'라는 노래가 있다.

예전에 지인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한동안 그 노래에 빠져서 틈만 나면 듣곤 했었다. 노래 가사 중 나의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 찌르기도 했던 가사가 있었는데 이 부분이었다.

'끝은 있는 걸까 시작뿐인 내 인생에'

노래 전체의 내용에서의 이 가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고된 하루의 반복'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부분의 가사말이 다른 의미로 내 마음을 쿡 찔렀던 거 같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단기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평생 내가 꾸준히 할 수 있는 내 마음을 채워줄 어떤 것을 해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운동을 해보기도 했었고, 관심 있는 분야의 모임에도 나가 봤었고, 새로운 공부도 해봤었다.

하지만 내가 했던 모든 것이 꾸준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나와 맞지 않았던 탓인지 또는 생각보다는 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마음속의 열정도 사라지고 있었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것들을 중도에 그만두게 되자 열정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스스로에 대한 냉소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뭘 한다고' 또는 '내가 그렇지' 등의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든 시작은 나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존감을 연료로 사용한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시동을 거는데만 그 연료를 사용했다. 그러자 더 이상 자존감을 충전할 수 있는 충전소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남아있던  존감을 다 써버리고 만 것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존감이 바닥난 연료통에 정품이 아닌 것을 채워 넣어야 했는데 그 연료의 다른 이름은 '본성'이었다. 연료통에 본성을 채워 넣으니 짜증이 조금씩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연료통 내부 곳곳에 나있던 흠 속에 짜증이 가라앉았고, 가라앉은 짜증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굳어져 가고 있었다. 사람의 연료통은 마음이다. 마음안에서 굳어버린 짜증은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고 조금씩 얼굴까지 올라왔다. 어느 날 우연히 거울속의 나를 보고 있으니 웬 괴팍한 노인이 나를 노려보는 거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 괴팍한 노인은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만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과 있을 때는 철저히 그 모습을 숨겼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건 놀라울 수준으로 마음속을 감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를 겪은 후 이제는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조차 잃어버렸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잃어버린 용기에 대한 반발로 나의 무능력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정말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가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물어오는 스스로에게도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조금 더 지나서 생각해보니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중독 같은 것이었다. 그 중독이 나쁜 의미의 중독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시작' 그 자체에만 중독이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중독 없었다. 높은 확률로 열정은 서서히 줄어간다. 열정과 중독은 같은 말은 아니나 가까운 존재임은 틀림없다. 열정이 사라지면 중독도 거의 같은 시기에 자리를 뜨게 된다.

 모든 도전하는 것의 과정에 중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과정의 중간에서 실패를 맛보는 일이나 또는 내가 가야 할 길에서 고통을 겪는 일이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다양한 '시작의 중독'을 겪은 나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모든 중독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금단 증상을 겪기 시작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내가 겪었던 그런 '짜증의 시간'도 금단 증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번만큼은 신중히 생각하고 오래도록 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퇴근을 하면 서점으로 향했다.

난 서점이야 말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할 수 있는 자가진단의 열린 장이라고 생각한다.

대형서점의 입구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부동산에 관심이 있으면 부동산 섹션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 역사 섹션으로, 만화책에 관심이 있으면 그쪽으로 가게 되어있다. 난 내 발길이 닿는 쪽으로 가서 책을 한두권 골라서 서점 내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관심이 있었던 곳은 소설 그리고 역사 쪽이었다.

세계사에 대한 책을 읽으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읽지 않을 수가 없는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역사를  읽고 있으면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이 그리스 문명으로 이전해 나가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스 문명에 대해 읽게 된다면 자연히 페니키아 인들과 그들의 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세계사를 다루는 대부분의 책은 영어의 근원이 되는 페니키아 인들의 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런 책들의 공통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단어의 어원에 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말해준다. 그런 것에 조금씩 흥미가 생기니 저절로 영어에 흥미가 생기게 되었다. 몇 권의 책을 더 읽고 난 후, 영어 공부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영어실력이 객관적으로도 괄목상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 한구석 지식에 대한 열망을 조금씩 채워주기에는 충분했다. 덕분에 상당한 시간을 잡생각 없이 책에 빠져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 지난 후 다시 마음이 허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영어공부는 이미 나의 일상이 되었고, 일상적인 것은 나에게 어떤 자극도 주지는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번에도 난 서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난 방향을 잃어버린 배처럼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 한복판에서 서서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서있었다. 고민 끝에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에세이 책 한 권을 들고 카페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그들의 생각을 다 읽고 보니 나의 일상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펜과 종이가 없던 나는 노트북을 꺼내서 메모장에다가 나의 하루와 생각을 끄적여 보았다. 다 쓰고 보니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놀라운 기분이 들었던 이유는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데, 그냥 놀랐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래서 조금 더 그때의 기분을 설명하자면 나는 몰랐지만 항상 내 마음속에 반투명 유리를 쳐놓고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윤곽만 보이는 나의 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글을 쓰자 반투명 유리는 투명 유리가 되었다. 윤곽만 보이던 나의 마음이 더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글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알게 되었다. 그 서툰 글만큼 나를 깨우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스스로에 대한 글을 적는다는 것은 평생 가장 가까이서 나를 지켜봐 준 나라는 존재를 위한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새로울 것 없는 누군가의 취미나 습관처럼 들릴 수는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단장시켜주는 작업일 수도 있고, 또 숨어 있는 진주를 일상 속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평범한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일상이란 모래에 파묻혀 특별한 줄 몰랐지만 사실은 '특별한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나를 외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야의 노래는 매번 시작만 하던 나에게 끝은 있느냐고 물어보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노래의 마지막 가사처럼 '지금 이 순간 끝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외치면 돼'라고 말해주고 있다.


어차피 끝이 없다는 건 이제 안다. 난 나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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