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 필구 Dec 04. 2022

건강검진후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건강검진을 올해에도 받으러 갔다. 건강검진을 받을 때는 아주 빨리 가거나 아니면 아주 늦게 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왜냐하면 어중간하게 가버려서는 온 하루를 병원에서 대기만 하다가 써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최대한 빨리 가려고 오전 7시 20분에 검진센터에 도착했지만,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약 100명 정도가 더 있었다. 어딜 가나 한 발 앞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진리인 거 같다. 건강검진을 매년 할 때마다 조금씩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거 같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나의 몸이 외세(?)의 침략은 물론 내부의 반란도 가볍게 진압하지 못하는 어떤 고대국가의 말기에 해당하는 의미인 거 같아서 서글프기도 하다. 아직 30대이니 국가로 치면 전성기를 갓 지난 시점이다. 또다시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이 집권한다면, 일사천리로 나의 몸이 강성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지만, 아직 나의 몸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여전히 운동은 하지 않고, 몸에 좋지 않은 것만 본능적으로 찾아다니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의심치 않았던 지난날과는 달리 조금씩 몸에 생기는 이상 징후 때문에 건강검진 결과표를 펼쳐보는 것이 예전에 꼭꼭 숨겨두었던 통지표를 어머니에게 들켜 웃음기 없는 눈으로 그것을 보고 계신 어머니의 표정을 살피던 순간만큼이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라리 출근해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결과표를 공유하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사무실에서 결과표를 다 같이 보고 있으면 너무 심각한 병 이외에는 저마다 자신의 비밀을 하나씩 공유한다. 고지혈증도, 지방간염도, 고혈압도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었다. 나의 몸에 자리 잡고 있던 질병 꺼내서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몸에도 같은 아이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한결 나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그래 모두가 가지고 있는 건데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의 마인드로 긍정적 회로에 불이 들어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용연수가 다되어가는 소모품 장비처럼 매해 조금씩 조금씩 쓸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지고 있다. 축구를 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가, 등산을 갈 수 없는 무릎을 가지게 되고, 나중에는 줄넘기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운동을 하지 않고,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스트레스가 있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고, 커피를 입에 달고 살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잘 알지만 모른척하고 싶었다. 그동안 참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보다가 이제 슬슬 내가(내 몸이) 무엇을 제일 원하는 지를 알게 된 후 안착한 생활 방식이기 때문인 거 같다. 좋지 않은 것임에도 너무 적응을 해버리면 우리의 몸은 그 해로운 것이 없으면 지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내가 건강검진을 받을 때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몇 해 전에 MRI 촬영을 했을 때였다. 평소처럼 누워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MRI통(?) 안에 들어가는 것은 잠시 눈을 감고 그 규칙적인 소음에 의식을 맡기고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갑자기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찾아왔다. 답답함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었고 순간 '잠깐만요'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하지만 낯선 느낌만큼이나 낯선 행동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숨이 조금 편하게 쉬어지자 조금씩 두근거림이 잦아들었다. 잠시였지만 순간 아찔한 경험을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XX공포증 같은 압도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공포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그 경험을 한 뒤부터 MRI 검진에 두려움을 느꼈다. 일 년에 한 번씩만 하는 검사라서 다시 통 안에 들어갈 때쯤이면 그전에 느꼈던 공포감이 거의 잊혔을 때쯤이었다. 그래서 처음의 두려움만 잠시 누르고 있으면 된다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조금씩 조금씩 그 증세가 심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문제는 올해였다. 나의 얼굴이 통 내부와 가까워졌을 때 몇 해 전의 그 공포감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마스크를 벗겨내고 검사를 담당하던 선생님이 씌어준 소음 차단 헤드셋도 급하게 벗어버렸다. 그렇게 해도 그 답답함과 공포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나을까 싶어서 눈을 감았지만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외쳐버렸다. "선생님!! 선생님!!" 사람이 들어왔고 난 잠깐만 빼 달라고 말했다. 두려웠다. 갑자기 심해진 증상과 결국 공포감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사람을 부른 내 모습도 너무 낯설었다. 잠깐 마음을 추스른 뒤 이번에는 눈을 꼭 감고 어떡해서든 버텨내자라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공포감이 엄습해왔지만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차분해지려고 노력하니 조금씩 조금씩 괜찮아졌다. 괜찮아지긴 했지만 검사가 끝날 때까지 불안함은 계속 지속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MRI공포증을 겪고 있었다. 저마다 극복하는 방법이 달랐고, 심지어는 안정제 주사를 맞고 들어가는 사람도, 더 심하면 수면을 한상태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엔 많은 공포증이 있다. 고소공포증, 광장 공포증, 폐소 공포증, 심해 공포증, 환 공포증 등. 공포증은 원인이 확실하진 않지만 불안장애와 마찬가지로 불안을 매개로 하는 신경회로에 이상이 생겨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쇠약해져 있던 정신이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TV에서 연예인들이 말하던 공황장애의 증상 중 하나는 '곧 죽을 수도 있을 거 같다는 느낌'이라고 본 적이 있다. 그제야 그들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전까지는 힘들었겠네의 정도였다면, 이제는 조금 더 감정이입이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문득 겪어보지 못한 감정에 대한 공감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서 쉽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참담한 일을 직접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천분의 일이나 내가 이해를 하고 있었을까? 한 번씩 터지는 국가적인 재난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는 제삼자들을 볼 수 있다. 아픔은 공유할 때 작아진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어쩌면 타오르는 마차의 불을 끄기에는 한없이 작은 한 컵의 물일지도 모르지만, 그 눈물이 모이면 그 아픔을 조금은 희석시킬 수 있는 새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떠한 일이 발생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죽음'에 대한 순수한 슬픔은 아주 짧은 정차역일 뿐이고, 결국 '정쟁'이라는 마지막 역으로 빠르게 달려간다.

결국은 '쟁점'이 된다. 쟁점이 될 일이 아님에도 쟁점이 된다. 순수하게 위로를 받아야 될 일에 논리가 들어간다. 논리는 또 다른 논리로 맞부딪친다. 결국 '사람의 슬픔'은 뒷전이 된다. 사람의 슬픔을 위로할 한 컵의 작은 눈물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있다. 분노는 슬픔을 위로할 수 없다. 분노의 열기는 액체를 증발시킬 뿐이다.

 감정을 가진 인간의 위대함은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위대함을 저버리는 행동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지금의 세태가 가슴이 아리다.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겪어보지 못한 아픔에 대해 우리는 공감할 수 없는가? 아니면 공감할 수 있음에도 외면하고 있는가?


 


작가의 이전글 한 겨울밤의 추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