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후 내가 겪고있는 혼돈
혼자 여행을 떠나기 망설여지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은 정말로 혼자만 있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가능성을 알고 있는가?
모든 사회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내 의사결정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들에게 '아니요' 답변이 많다면, 그런 경험이 없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혼자 여행을 하길 권장한다. 사실 권장 정도가 아니다. 필수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다녀와서 엉망진창으로 변해버린 나의 삶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갑작스럽게 세게 넘어져서 타격이 크지만, 언젠가는 직면했어야 할 문제였다.
아프다는 것은 성장하기 때문인 것.
한살이라도 어릴 때 나를 더 아프게 만든 내 20대 첫 여행, 같이 여정을 보내준 여행에서 만난 독일 친구 니나, 사무엘, 영국 친구 아마리, 인도 친구 니티시, 사랑하는 나의 사촌 언니에게 모두 감사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행을 다녀와서 지금까지의 내 타임라인이다.
2022년 1년을 휴학으로 보내고
2023년부터 1월 중순 ~ 2월 중순까지 여행을 다녀왔다. 3월에는 학교를 복학했다. 4월에는 점점 죽어갔고, 5월이 된 지금 다시 중도 휴학을 했다.
휴학 후 중도 휴학은 대학생 타임라인에서 굉장히 위험한 신호이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1달간의 여행 후, 내 안의 무언가가 건드려졌다.
살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나 혼자 결정해 본 게 없었던가? 인생 전반에서 내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던 것들은, 사실 내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55kg의 내가 유럽에 들고 간 짐은 25kg이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쌀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계속 질문을 했다.
이거 가져가야 하지 않겠니?
저거 필요하지 않겠니?
유럽은 소매치기가 많고 물이 우리나라와 다르고....
필요 없다고 말하면, 반박하신다.
그냥 사라는 말이다.
그렇게 내 짐은 늘고 늘어 내 몸무게의 절반이 되었다.
내 짐은 헬스장에서 데드리프트 했던 것처럼, 숨을 한번 들이쉬고, 숨을 참고, 배에 힘을 주어야지 간신히 들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도 내 짐을 내가 스스로 들고 올라가지 못해 유럽 남자들의 도움을 몇 번이고 받았다.
내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짐의 무게였다.
막상 가서 생활하니 필요 없는 짐들이 많았다. 커피포트, 필터 샤워기, 가이드북, 입지도 않는 목티 등등.... 모두 5~ 7kg이나 되었다.
그 필요 없는 짐의 무게는 어머니의 불안의 무게였다. 나는 항상 어머니의 불안의 무게를 지고 다녀야 했다.
내 인생 전반도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나는 항상 어머니의 불안을 지고 살아야 했다.
나는 창의적인 사람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이디어는 자동으로 디벨롭된다. 그래서 기획자를 하고 싶었다. 중학교 때는 내가 게임 기획한 것을 적어놓는 노트가 있었다.
어머니는 전략적으로 컴퓨터 공학과에 진학하자고 했다. 어렸을 때 쓴 일기에는 나는 기획자가 되고 싶은데 자꾸 개발자가 되는 쪽으로 어머니가 진로를 맞추신다고 적혀있었다. 나름의 속상함이 있었지만, 잘 따라갔나 보다.
그렇게 컴퓨터 공학과에 진학한 나는 교양으로 들은 창업 수업이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기획서를 쓰자고 시작하면 가슴이 뛴다. 아이디어를 내는 아이디의 톤은 졸리다가도 눈이 번쩍 떠진다. 모의창업 프로그램은 너무나도 좋았다. 기획서를 갈아엎고 바꾸고 사용자의 심리를 분석하고 피드백하고.
어머니께 기업가정신 학과를 복수전공한다고 하니, 그것은 취업에 무슨 도움이 되냐고 물어보시고, 마음에 안 드신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나중에 나를 대학원까지 보낼 생각도 하시고 계신다고 한다. 사업을 하고 싶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내내 불렀을 때마다, 좋은 대학을 가야 좋은 동료들이 생긴다고 말씀하셨다. 대학을 가니 좋은 회사에 가야 좋은 동료가 생긴다고 그 이후에 사업을 하라고 하신다. 회사에 가면? 어떤 족쇄로 나를 또 묶어놓으실까?
나도 모르는 내 인생계획이 어머니 머릿속에 정해져 있다.
아아
숨 막힌다.
왜 엄마는 내 선택과 판단 가치관 우선순위를 한 번도 물어봐 주지 않았을까?
왜 엄마는 내 친구들보다 내 남자친구들보다 나에 대해 모를까?
왜 엄마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응원하지 않았을까?
여행 후 한 달 동안 혼돈의 시간을 겪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정말 작은 것에서 나왔다.
나는 면을 먹지 못한다.
먹으면 1/4을 남긴다.
어머니께서 칼국수를 먹자고 하셨다.
어머니: 점심은 칼국수 먹자
나: 나 면 진짜 못 먹어. 엄마 내 친구들도 다 알아.
어머니: 아 진짜?
이 패턴의 대화는 지난 3년간 있었던 패턴이다.
삶을 돌아보니 엄마가 나를 어르고 달래려는 목적일 때 빼고,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동생에게는 왕자님이라 부르면서 먼저 팔짱 끼고, 나에게는 끼고 있던 팔짱을 빼며 징그럽다고 말한다. 동생은 '밥 줘.', '아 꺼지라고' 그리고 심한 쌍욕을 비번이 해도 집에는 붙어있게 해주면서, 나는 내 방에서 게임을 하는 게 싫다며 내 자취방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학교폭력을 당해 학교에 가기 싫다고 버스에서 울면서 전화해도, 나에게 도대체 왜 이러냐면서 소리 질렀다.
과거에 눌러놨던 상처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나는 가족이 살아있지만, 가족이 없다.
내 인생이 망해도, 나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다.
나를 믿고 항상 응원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
진짜 나를 알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연락할 존재가 이 세상에 없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외로움은 나를 두 달 동안이나 서서히 갉아먹었다. 외로운 서울살이의 시작은 이를 더 가속화시켰다.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철학 오디오를 들으며 2달을 버틸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나 보다.
내가 더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우연히 친구가 전화를 걸어줬다.
친구는 나를 잃고 싶지 않다고 해줬다.
나도 내가 없어질까 무서웠다.
그렇게 우리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전화를 마쳤고,
내가 버릴 수 있는 것은 학교밖에 없어서, 학교를 버렸다.
내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홀로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질 필요 없는 남들의 불안을 평생 지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새로운 가능성과 재능도 많이 찾았다.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이제서야 조금 더 알 것 같다.
나는 나로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독립적인 사람이 되었다.
여행은 내 인생의 아주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비슷한 경험을 겪었으면 한다.
진정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는, 그런 경험 말이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응원해 줬으면 한다!
서로의 애착과 에너지를 주고받고, 씩씩하게 다음 도약을 하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