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관리자의 고통에 대하여
금요일에 반차를 내고 고양으로 향했다. 인천에서 같이 일하다가 고양으로 이직한 L씨를 만나기 위함이다. 함께 일한 것이 3년, 헤어진 후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만나자, 놀러 와라, 이야기했지만 찾아가지 못하다가 이번에 다른 동료들이 점심 약속을 잡았다기에 그 기회에 편승하기로 했다.
나에게 L씨는 엄마 같았다.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L씨에게 불려 가 함께 차를 한 잔 마시면 어느샌가 이것저것 속내를 드러내기 일쑤였다. 결혼 전에는 일 이야기, 결혼 후에는 결혼생활 이야기를 주로 나눴던 것 같다. 산악회의 단 둘밖에 없는 여성회원으로 등반길에 함께 으쌰으쌰 하며 우정을 다지기도 했다. 울릉도 1박 2일 투어 때는 같은 방을 썼다. 늘 마음으로 그리는 L씨였다.
오랜만에 만난 L씨는 다크서클이 늘어있었다. 인천에 있을 때도 멀리서 힘들게 출퇴근했었는데 지금도 고양까지 편도 2시간 이상을 쏟고 있다고 했다. L씨는 이직을 하면서 직급이 올랐다. 이제는 중간관리자의 위치에 있었다. 마냥 긍정적인 L씨였지만 요즘은 상사와 부하 사이에서 힘들다고 했다.
L씨의 상사는 사무실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을 알아야 성미가 풀리는 사람이라고 한다.(그것은 우리 보스도 마찬가지다.) L씨의 부하는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것이었다. 상사는 L씨를 불러 부하를 관리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L씨는 사람을 쥐고 흔들기보다는 개성을 존중해주고 싶다고 했다. 부하가 일탈 없이 본인이 맡은 일을 잘하고 있다면 굳이 억압하기보다는 자유롭게 두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L씨의 생각에 동의한다. 만약 내가 목표하는 바가 있고 완벽한 플랜이 있어 부하는 그저 그 플랜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가정한다면 부하에게 나의 플랜을 따를 것을 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목표는 분명하지만 구체적인 플랜이 없고, 반면 부하는 그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는 플랜을 가지고 있다면 상사로써 해당 플랜을 공유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보고는 해야겠지.
L씨의 상사는 1부터 10까지 전부 보고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까.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까. 나의 상사는 보스에게 미주알고주알 전부 보고한다. 내가 정말 신기하고 대단하게 생각하는 능력 중 하나가 상사의 보고서 작성능력이다. 목요일 저녁 퇴근 직전에 내가 작년 10월에 친 사고가 밝혀졌다.(나도 사고를 쳤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음에도 금요일 출근을 했더니 상사가 20매가 넘는 양의 보고서(라고 쓰고 경위서라고 읽는다)를 작성해 둔 것이다. 보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정말 놀라운 능력이다.(15년이 지나도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
(사고를 쳐서 승진을 못할 수도 있지만 정상적으로는) 앞으로 5년 정도면 나도 승진을 할 것이다. 지금은 후배라고 부르지만 그때가 되면 나도 부하가 생기겠지. 후배랑도 잘 지내지 못하는데 부하는 잘 관리할 수 있을까 그것이 늘 걱정이다. 오늘 L씨를 보면서 생각했다. 누군가를 관리하려면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내가 옳다는 것에,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너는 나를 따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리더가 흔들리면 그 프로젝트 자체가 흔들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꼭 내가 아니어도 괜찮을 수 있구나. 부하가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겠구나. 내가 다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그렇다면 나는 내가 가진 최선의 도움을 주면 되는 것이구나.
일단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잘 배우고, 경험을 쌓고, 공부하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