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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Dec 26. 2022

손님 여러분, 잠시 후 영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입사를 한 후 지금까지 비행기는 외형은 그대로인 것 같지만 시스템적으로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물론 비행기라는 게 만들어지고부터 꾸준한 발전이 있었겠지만 나는 기계 쪽으로 전문가도 아니고 관심도 없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이 일을 시작하고부터 겪어온 변화다.


에어버스 380이 들어오기 전까지 보잉 747이 가장 큰 기종이었다. 747을 타고 장거리는 다 다녔다. 긴 시간을 비행기에서 보내려면 무료한 시간을 달래줄 영상물이 꼭 필요하다. 그때는 상위클래스인 퍼스트, 비즈니스가 아닌 일반석은 손님들이 메인스크린으로 영상물을 다 같이 보는 구조였다. 상위클래스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영상물을 보는 AVOD시스템이 아니고 두 시간 반마다 영화가 반복 상영되는 시스템이어서 원하는 부분부터 보려면 그 반복되는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면세품을 담당하는 승무원이 비디오도 같이 담당했는데(일반적인 식음료 서비스에 추가해서 담당한 것이니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업무가 과중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영상 관련 업무는 매니저의 주 업무가 되어서 그 일에서는 벗어났지만 말이다.) 비행기에 들어서면 크고 까맣고 기다란 가방에 가득 들어있던 비디오테이프를 일일이 확인하고 비디오플레이어에 순서에 맞게 세팅해야 했다.

일반석은 존(ZONE)이라고 나뉘는 구획마다 첫열 중앙에 큰 스크린이 있어서 첫 번째 식사서비스가 끝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다 같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손님 여러분, 잠시 후 영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누구누구 주연의 ㅇㅇㅇ와 누구누구 주연의 ㅇㅇㅇ입니다."라는 안내 방송을 고 극장처럼 조명을 소등했다. 한 영화가 끝나면 화장실 다녀올 시간을 좀 허락한 후에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되었다.


난 그 시간을 좋아했던 것 같다. 기내가 깜깜해지고 영화를 보기 위해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던 손님들을 보면 나도 간 들뜬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개인기기로 영화를 쉽게 보던 때가 아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 노트북으로 불법다운로드한 최신영화를 쉽게 보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OTT서비스가 대세인 세상이니 불과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정말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요즘 가끔 다 같이 영화 보던 그때가 생각난다. 아니 그립다고 말해야 맞을 것 같다. 그때는 손님들이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데 방해가 될까 독서등을 켜지도 중간에 화장실을 가지도 창문을 열지도 않았다. 모두를 위해 모두가 배려했다. 행여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영화를 못 보더라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다 같이 못 보는 것이었으니까.

그 뒤 개인모니터가 장착되고부터는 모니터 관련 불만은 꾸준히 발생했다. 당연히 티켓을 구매해 탔으니 겪지 않아도 되는 불편을 겪는 건 화가 나는 일이다. 나는 그런 일을 지켜보며 엉뚱하게도 상대적 박탈감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주위사람들은 다들 문제없이 즐기고 있는데 왜 나만 피해를 보아야 하나.'라는 마음이 더욱 억울하고 화나게 만든 건 아닐까라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유달리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SNS를 최소한으로 쓰고 있는 나인데도 말이다. 손안에 쥔 스마트폰으로 우리는 쉽게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생활은 날로 편리해지고 있는데 그 편리함 만큼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모르는 게 약'이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 말이 있는 걸 보면 이런 감정은 인간으로 태어날 때부터 장착된 감정이겠지만은 삶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는 요즘에는 나도 모르게 정보력이 한정적이던 옛날을 그리워하게 된다. 옛날이 좋았다는 어르신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옛날로 회귀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뿐더러 옛날을 그리워만 하고 현재에 적응하려 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건 나를 더욱 고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삶 속에서 잘 살아가려면 삶을 살아가는 방향을 정하고 내 마음을 잘 어루만질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찾는 것이 필요하다.


요 며칠 여러 가지 마음으로 심란하고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울고 싶은 마음이 충만하지만 나름으로 이 시간을 잘 넘기리라 믿는다. 다 같이 영화를 보던 그 시절이 그리워도 어쩌겠는가. 그건 그냥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야지.




요즘 손님들은 개인 기기에 보고 싶은 영상들을 다운 받아 와서 이제는 개인 모니터도 별로 의미 없는 시기가 된 것 같다. 실시간 방송을 한다면 모를까. 참 얼마 전에 끝난 월드컵을 실시간으로 보게 한 항공사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새삼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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