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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May 21. 2023

서울에서 살아남기

모범택시와의 추억

"다 왔으니 얼른 내려요!"

택시기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더욱 주눅 들게 했다. 나는 서둘러 내렸고 택시기사는 트렁크에 있던 내 이불보따리를 패대기치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미안해하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황급히 떠나는 택시를 바라보았다.


1997년 5월의 일이다.

내게 스쳐 지나간 일들 중에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들이 하나라도 있을까.

그해 나는 항공사에 취직했고 신체검사 중 발견된 빈혈로 인해 입사가 몇 달 늦춰진 상태였다.

고기를 즐기지 않던 우리 집에서 나의 빈혈수치 개선을 위해 엄마와 나는 부단히 노력했고 마침내 입사 통보를 받았다. 그게 5월이다. 그렇게 날 좋은 5월에 나는 입사식을 치르고 다시 집으로 가 짐을 싸들고 서울로 말 그대로 상경했다.


나는 부산을 벗어난 본 적이 없다. 큰집이 대구여서 명절에 가족과 같이 간 것과 경북 의성에 있는 큰 고모댁에 종사촌 언니를 따라가 일주일간 머물렀던 게 집을 벗어난 전부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대학 때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지역을 방문했었다.

정정해서 말하자면 부산 이외의 대도시를 방문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회사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신입직원을 위해 네 명씩 짝을 지어 가양동에 있는 회사가 얻은 전세 아파트에서 지내게 했다. 3개월 동안의 신입훈련이 끝나면 각자 집을 구해서 나가야 한다.

본격적으로 집을 벗어나 독립된 삶을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어서 설렘반 걱정반이었던 것 같다. 이불하나 살 줄 몰랐던 나는 부산에서부터 엄마가 사준 이불 보따리를 들고 직원할인받은 비행기를 타고 5월, 그 좋은 계절 저녁 무렵에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김포공항에 내려보니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택시들을 바라보다 짐이 많으니 일반택시보다는 모범택시를 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짐을 끌고 모범택시에 탑승해 가양동에 있는 아파트에 가달라고 했을 때 아저씨는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장거리 손님을 태우려고 몇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그렇게  가까이 가면서 줄 서있는 택시를 타면 어떡해!"

반말이었고 아저씨는 가는 내내 내게 끊임없이 화를 냈다. 나는 아저씨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죄송한 마음에 아저씨에게 만원을 드리겠다고 했고 목적지는 정말이지 너무 가까웠다. 택시에서 내리며 적은 요금이 나온 걸 죄송해했다. 그리고 나는 97년도에 택시비 만원을 드렸다. 아저씨는 만원을 받아 챙겨 이불보따리와 나를 남겨두고 그렇게 황급히 떠났다.


회사가 지정해 준 아파트는 12층이었다. 짐을 어렵게 챙겨 동호수를 확인한 다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난번에  인사를 나눴던 동기들이 나를 반겨 주겠지. 두 명이 먼저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벨을 누르고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을 때 낯선 젊은 여자의 얼굴이 문을 열고 나왔다. 서로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누구... 세요?"

"여기 ㅇㅇ항공 숙소 아닌가요?"

나는 그녀 뒤쪽으로 동기들의 얼굴을 찾았지만 아장아장 아기가 걸어 나올 뿐이었다.

"어디를 찾아오신 거죠?"

"가양아파트요. ㅇㅇ항공 숙소요..."

"잘못 찾아오셨어요. 여기 아니에요. 여기는 방화동 아파트예요."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다.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몸을 움직였을 때 나는 이제 분노로 가득 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런 그에게 나는 자그마치 만원을 지불하지 않았던가. 서울은 눈 뜨고도 코가 베인다더니 나는 서울살이를 시작하던 첫날에 확실한 경험을 했다. 그 일로 나는 서울에서 살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과 어리숙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마음에 새겼다.


그 후 서비스 전문직으로 배우고 실제 근무에서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며 나만의 잣대를 만들어 나갔다. 어디를 가도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면 따지고 들었고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이 어리숙해서 당하는 일들을 보면 참지 못하고 꼭 나서고 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두 아이를 키우며 시행착오를 거쳐 나름의 여유와 현명함을 장착했다고 생각한 나는  이제는 너그럽게 바라볼 줄도 알고 따져야 될 때와 그냥 넘어가야 할 때도 안다. 하지만 여전히 온전히 타인의 잘못이라고 느낄 때 용서란 없다. 그들로 인해 손해를 보는 건 더더욱 참을 수 없다.


그런데 며칠 전 방문한 곳에서 얼마 되지 않는 돈 때문에 언성을 높인 적이 있다. 두 차례나 확인했음에도 벌어진 일이라 이건 내 잘못이 아니고 온전히 타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따지고 들었고 나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승리한 순간부터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비참한 승리였다. 지나고 보니 부끄러웠다. 내 나이 오십...


서울에서의 삶은  빡빡하다. 지금까지 늘 누군가에게 당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그날 찝찝함과 부끄러움을 느낀 후 이제는 호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조금씩 손해를 보고 사는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알면서도 때때로 호구가 되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그래서 세상이 나에게 빡빡함을 요구하더라도 내가 내 삶의 나사에 윤활유를 부어 잘 돌아가도록 해보자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일을 겪더라도 언성 높여 따지거나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거나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지 말자 다짐하거나 하지 말고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갖자는 거다. 이제 내 삶의 품위를 지켜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젊을 때는 특히 부모 품을 벗어났을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청춘들이여! 모두 서울에서 잘 살아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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