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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니의 글적글적 Nov 14. 2023

우리의 여행이 별거 있는 이유

마흔 살 힐링담론: 여행




  

  5년 만이다. 온 가족이 함께 베트남에 가는 중이다. 나는 생각보다 작은 크기의 비행기에 투덜대며 의자에 몸을 구겨 넣듯 앉았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의 얼굴에는 한 달을 꼬박 기다려온 설렘 때문인지 피로함보다 생동감이 넘친다. 밤하늘에서 내려보는 도시는, 붉은 점들이 은하수처럼 펼쳐져 있다. 반짝반짝 빛나던 점들이 점차 흐릿하게 멀어지고, 나는 까만 어둠과 고요함으로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이번 여행에는 어떤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감으로 다시 눈을 떴을 때, 요란한 흔들림과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 위에 내려앉았다.    

  

  10월의 어느 새벽녘, 우리 가족은 베트남 도시 가운데 하나인 다낭 공항에 도착했다. 중등, 초등학생인 두 아들은 아빠 손을 꼭 잡은 채 양옆에 붙어 걸었고 나는 아이들의 수행원처럼 바짝 뒤를 따랐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을 쫓아 빠르게 수화물을 찾았다. 자정이 지난 시간인데도 공항 안은 여행자들로 분주했다.


   공항 출구를 빠져나오자 우리를 처음 마중 온건 미세한 온도 차와 담배 냄새였다. 공항 광장에는 아무렇지 않게 흡연 중인 사람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 초록색 택시, 구릿빛 얼굴, 텐션 좋은 목소리. 우리 가족은 이 복잡 미묘함이 뒤섞인 공간에 마주 보고 서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먼저, 우리는 베트남에서 쓸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ATM기를 찾았다. 베트남에 오기 전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두었기 때문에 광장 한편에 있는 ATM기를 쉽게 발견했다. 남편이 한국에서 미리 발급받아 충전해 놓은 트래블로그 체크카드를 들고 입출금기 앞에 섰다.


  우리는 마치 ‘영화 미션임파서블’의 한 장면처럼 진지하게 작전을 개시했다. 비좁은 ATM기 안으로 네 식구가 모두 들어갈 만큼 환전은 우리에게 대단한 호기심이었고 중요한 일이던 것 같다. 남편이 현금인출기 투입구에 카드를 넣자 큰아이가 한글 버전을 눌렀고 조심스레 안내 매뉴얼을 따라 했다. 남편은 현금 투입구가 열리자마자 곧바로 돈을 꺼내 센 후 작은아이에게 건넸고, 작은아이는 약속이나 한 듯 한 번 더 센 돈을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절대 소매치기는 당하지 않겠다’라는 마음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경계했다. 난생처음 현지에서 해보는 환전이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우리는 제법 호흡이 잘 맞는 4인조였다.     


  그다음으로 예약해 둔 렌터카를 찾아 모두 함께 이동했다. 광장 중앙 쪽에서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마른 몸매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렌터카 회사 직원이었다. 김ㅇㅇ. 직원은 남편 이름이 적힌 안내판을 들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보니 어쩐지 반갑고,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는 “신짜오.”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은 뒤 공항주차장으로 자연스레 이동했다. 

  

  나는 어두운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가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라는 약간의 의심이 들었던 것 같다. 렌터카 직원이 트렁크에 짐을 싣는 사이 나는 번호판을 다시 확인하고 자동차에 올라탔다. 남편은 기사님께 목적지였던 호텔을 재차 확인했고 기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한 미소로 화답했다. 곧 자동차가 다낭 시내 도로에 진입하자 낯선 여행자를 반긴다는 듯 네온 등이 화려하게 빛을 쏟아 냈다.


  다음 날 호텔에서 처음 아침을 맞았을 때, 장대비가 쏟아졌다.  린응사에 갔던 날도 그랬다. 렌터카를 타고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비바람이 몰아쳤다. 우비에 우산까지 써도 온몸이 비에 다 젖을 만큼 강렬한 폭우였다. 그러면서도 위안이 되는 건 다른 여행자들 얼굴이었다.

  그 해맑은 미소 때문인지, 비 때문인지 전각은 더 신비스러운 분위기였고, 30층 건물 높이라는 해수관음상의 크고 웅장한 모습을 놓칠세라 연신 카메라를 눌렀다.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발등 높이까지 차오른 물 웅덩이를 찰방찰방 뛰어다녔고, 우산이 바람에 뒤집혀도 깔깔거렸다.


  그 뒤로도 빗속 투어는 계속 이어졌다. 흙탕물 위를 유영하던 호이안의 바구니 배, 낭만 가득 올드타운의 밤거리 산책, 호기심을 담아 띄워 보낸 소원초, 줄을 서서 기다리던 호이안 콩 카페, 흥정 넘치던 베트남의 한 시장, 거룩한 느낌의 안개 낀 바나힐…. 

  바나힐의 아침을 빼곤 하루도 맑은 날이 없었다. 비로 시작해서 비로 끝나는 현실에서 '계획대로'라는 것이 무의미했다. 나는 처음엔 비 때문에 ‘망했다’라고 생각했다가 오히려 언제부터 편해졌다. 베트남 사람들의 유난히 밝고 긍정적인 모습도 그런 이유일까. 자연의 섭리에 수긍하고 나니 변덕스러운 날씨는 오히려 즐길 거리였다. 아이들도 비 오던 린응사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누군가는 ‘멀리까지 가서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사진 몇 장 건지는데 그 비싼 비용을 들이느냐’라고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여행의 특별함을 잘 몰라서 하는 말씀이시다.

  철저하게 준비했던 길이 예측하지 못한 변수로 변경되기도 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일이 꼭 생각대로 안 될 때가 있음을 배운다. 그럴 땐 다른 길로 가면 그만이다.

  또, 공항검색대에 서보는 일, 비행기 좌석을 찾는 일, 낯선 땅에서 ATM기를 쓰는 일, 호텔 체크인을 하는 일, 베트남 동을 원화로 환산하는 일, 다른 언어의 메뉴판을 번역해 본다거나 스스로 맛집을 찾아보는 일, 새로운 곳에서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어 보는 일, 빗속을 달려보는 일. 이 모든 일은 결국, 우리 가족에겐 도전이며 여행에서 받은 선물이었다.    

  

  4박 6일간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한국으로 가는 밤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아이들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하다. 대신 처음 다낭공항에 도착했을 때보다 한결 여유 있는 모습이다.

  나는 아이들이 세상에 나아갈 때도 그랬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 낯선 공간을 만나도 두려움 없이, 스스로 즐길 수 있길 바란다. 

  여행은 우리에게 고생이면서도, 기대하고 설레는 날이기를. 그것이 우리가 가족여행을 하는, 우리의 가족여행이 별거 있는 이유다.  이제, 비행기가 굉음과 함께 서서히 날아오른다. 나는 또, 별거 있는 다음 여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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