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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말 들을껄

엄마 나이가 되어보니 알겠어요

by 샤이닝로투스

늦은 밤 배가 고파 컵라면을 꺼내 먹는다. 국악원을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난다.

엄마는 그때 장구를 배우셨다. 먹고살기 바쁜 때였다.


자진모리장단 세마치장단 굿거리장단. 장구를 익히는 엄마 덕분에 나는 가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타령도 듣고 민요도 들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창부타령이나 한강수 타령은 그다지 흥겹지 않았지만. 공으로 익힌 셈이다.


그런 장단들을 배워 도대체 어디다 쓸까.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즈음 엄마 나이를 먹고 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남편을 잃고 생계를 짊어진 젊은 미망인에게 장단을 배우는 일은 최고의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하루하루가 줄타기처럼 굿거리 장단에 조마조마하고 때로는 아무 일 없이 살아지는 중중모리장단 같았을 것이다.


“세상천지 아무것도 몰라요.”

“아직 철이 없어요.”


느닷없이 고전무용을 배우라며 국악원에 날 밀어 넣기에 내가 투정을 부리자 원장님께 엄마가 건넨 말이다.

나는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마흔을 넘기고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세상엔 몰라도 되는 것들이 참 많다. 모르고 살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데 내가 이상타 여기는 눈을 갖게 될까 봐 엄마는 걱정한 것이다.


이상하다는 건 이상한 걸 보고, 겪고, 느끼는 순간 이상한 걸 알게 되니까. 그냥 철없는 아이로 천지 분간 못 하는 애로 내가 티없이 자라 길 엄마는 바랬는지도 모른다.


살아간다는 건 장구의 여러 장단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굴곡진 순간마다 절절하고 때로는 정박하고 가락마다 장단에 맞춰 무악을 울리는 일일 것이다.


내 인생도 도드리장단에 맞춰 완만하고 꿋꿋하게 춤을 춰 보라고 엄마가 나를 국악원에 밀어 넣었던 건 아니었을까.


늦은 밤 배가 고파 컵라면을 꺼내 먹는다. 맛없이 끼니를 때우며 지금이 인생의 굴곡진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아직 장단을 다 타지 않았다.


휘청거리며 엄마가 걱정하는 이상타 여기는 눈을 가지진 않았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엔 아름다운 것들이 더 많다.

세상천지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로 살기엔 현대 사회는 너무 각박하다.


느리게 사는 여유가 없더라도 하루하루 완만하고 꿋꿋한 장단에 맞춰 살겠노라고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며 나의 무악을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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