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카스트 제도 뺨치는 영국의 클라스
한국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며 영국에서도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 처음에는 배우자가 한국인이거나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려는 학생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나이에 상관없이 각자 다양한 이유로 한국어를 배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지난 2년간 한국어를 예체능처럼 배우려는 어린 학생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한국어를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배우듯이 예체능으로 배운다.
한국어를 예체능처럼 배우려는 학생들은 대부분 상류층의 자녀들이다. 영국에는 한국처럼 학원의 개념이 없어서 사교육은 대부분 다 일대일로 과외 선생님을 들여 가르쳐야 한다. 국어나 수학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언어를 일대일로 과외 선생님을 붙여가며 가르치려면 돈도 돈이지만 부모님이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아야 한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대부분 부촌이 모여있는 런던의 서쪽이나 북쪽에 살고, 한국어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와 악기, 스포츠를 배운다. 한 학생을 예로 들자면 이 학생은 하프텀 방학마다 유럽 내 인접 국가로 승마 캠프를 거거나 스펙을 쌓기 위한 다양한 대회를 준비한다. 영국에서 코로나가 터지고 락다운이 시행되며 런던의 좁은 집에서 사람들이 고통받을 때, 이 학생의 부모님은 잽싸게 아이를 교외에 있는 조부모님의 별장으로 보내 삶의 질을 유지시켰다.
또 다른 상류층 학생은 집에서 홈스쿨링을 한다. 부모님과 아이가 한 팀이 되어 일정한 커리큘럼대로 공부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과외 선생님을 붙여가며 아이를 교육시킨다. 한국어는 케이팝을 접하게 된 아이가 배우길 고집해서 선생님을 알아보다가 나를 만나게 됐다. 집에는 드넓은 정원이 있고 아이의 학교이자 공부방인 컨서버토리에는 여기가 정녕 영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쬔다. 화초를 기르는 게 취미인 아이 어머니 덕분에 집안 곳곳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살고 아이는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하루하루 성장해 나간다. 그야말로 너무나도 안정되고 화목한 가정이다.
이렇게 상류층의 자녀들을 보다가 우리 동네로 넘어오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또 펼쳐진다. 나는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런던의 동쪽에서 6년째 살고 있다. 동쪽의 분위기는 서쪽이나 북쪽과는 완전히 다르다. 유색 인종의 비율이 훨씬 더 높고 거리 곳곳을 채운 그라피티가 동네의 자유분방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동쪽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영어의 악센트도 조금 다르다. 길을 걷다 보면 슬랭이 많이 섞인 코크니(cockney) 영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데 코크니는 전통적으로 런던에서 상류층의 정반대인 워킹 클라스 (working-class)가 쓰는 영어였다. 처음에는 코크니 특유의 슬랭과 줄인 영어를 알아듣기 힘들다가 이제는 동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가장 친숙한 영어가 되었다.
얼마 전에는 우리 동네 길가 끝에 사는 초등학생 아이와 친구들이 우리 아파트에 무단 침입을 했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남편과 산책을 하러 나갔는데 아이들 세 명이 당당하게 아파트 1층에서 전기 스쿠터를 충전하고 있었다. 아마 이웃 중 한 명이 문을 열고 나간 틈을 타 들어온 것 같았다. 우리는 아이들이 여기에 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걸었다. "안녕, 너희들 여기 사니?" "아니요." "그런데 왜 여기서 스쿠터를 충전해? 이 전기세는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관리비로 내는 거야." 그랬더니 아이 한 명이 슬슬 당황하면서 거듭 진짜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며 하는 말이 이랬다. "엄마가 요새 전기세를 못 내서 집에서 스쿠터 충전을 못해요." 작년 겨울부터 영국 에너지 요금이 급격히 상승해서 추운데 보일러도 못 틀고 버티는 집들이 있다는 걸 뉴스로는 봤지만 그게 내 이웃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인데 어떤 아이들은 우아하게 과외 선생님과 한국어를 배우고 어떤 아이들은 그 시간에 도둑이 되어 전기를 훔쳐야 한다. 우리 아빠가 어렸던 한국 전쟁 직후도 아니고 21세기에, 그것도 나름 잘 산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라 영국에서 벌이지는 일이다. 영국의 빈부격차는 단순히 경제적 수준의 차이를 넘어 '소셜 클라스'라는 보수적인 사회 구조가 더해져, 서울의 강남과 강북의 차이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케일이 크고 견고하다. 이번에 새롭게 교체된 영국 총리 리시 수낙에 대해 말이 많은 것도 이 클라스 때문이다. 리시 수낙은 상류층 중에서도 최상위인 어퍼 클라스다. 리시 수낙의 아내 또한 어마어마한 인도 재벌가의 딸이라 부부의 재산을 합치면 찰스 왕을 이긴다고 한다. 리시 수낙이 총리가 된 후 영국에서는 리시 수낙이 20년 전 소셜 클라스를 주제로 한 BBC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워킹 클라스인 친구가 없다."라고 인터뷰한 것이 다시 회자되었고, 리시 수낙이 빈민가를 방문할 때 신은 프라다 구두가 도마에 올랐다. 이런 하이 클라스의 총리가 과연 남의 아파트에서 스쿠터를 충전해야 하는, 이스트 런던 어딘가에 사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큰 회의감이 든다.
영국에 사는 이민자로서 지금껏 나는 영국의 클라스가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나도 모르게 코크니 영어를 구사하고 화들짝 놀라는 나를 보며 어이없고 허탈한 웃음이 난다. 비록 이스트 런던에 살지만 언어만큼은 품위 있는 영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내가 너무 영국인스러워서다. 아직도 클라스가 존재하고 귀족과 왕실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살면 살수록 내가 해당되는 계층은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과연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리그는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