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토론의 향연
2023/08/26(토) 14:00
TOM1관
A열
90분(인터미션 없음)
56,000원(재관람할인)
프로이트 남명렬
C. S. 루이스 카이
작년 시즌에 재밌게 봤던 연극이 돌아왔다. 더군다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이 배우님이 나온다니!! 누가 나오든 당연히 챙겨 볼 연극이었는데 (무조건) 봐야 할 이유가 더해졌다. 개막한 지는 꽤 지났지만 현생에 치여 이제야 보러 간 것이 너무 아쉬울 만큼, 작년보다 더 재밌고 유익한 시간이었다(작년 후기는 여기에서). 극이 시작되고 단 10분 정도가 지났는데도 여러 번 볼 수록 더 좋은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카이 배우님 딕션/감정 좋은 건 익히 잘 알고 있는데, 거기에 남명렬 배우님의 포스까지 더해진 이 페어.. 어마무시했다.
남명렬 배우님의 프로이트는 상대적으로 많이 젊은 프로이트라 그런지, 신구, 오영수 배우님의 프로이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루이스와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해 온 스승과 제자의 느낌, 루이스에게 더 솔직한 느낌, 어딘가 좀 더 친밀한 느낌을 받은 것 같다. 신구 프로이트를 봤을 땐 1940년대를 사는 실제 프로이트를 본 느낌이었다면, 명렬 프로이트는 2023년을 사는 프로이트 같았달까.
또한 극의 무게는 루이스보다는 프로이트에게 달렸는데, 무대 전체, 아니 극장 전체의 공기를 이렇게 잘 흔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순간순간 극을 이끌어가는 에너지가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가 변함에 따라 극의 흐름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몸짓과 표정에서도 그들의 생각이나 인생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엄청난 페어였다.
프로이트의 라디오(사진 오른쪽 구석)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작년에도 참 좋다고 느꼈는데, 이번엔 단순히 좋다는 것을 넘어서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나의 감정을 묘하게 파고드는 이 음악의 주인들이 궁금해졌다.
이 연극에서 사용한 음악은 다음과 같다. (친절한 파크컴퍼니 덕분에 프로그램북에서 음악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Edward Elgar - Pomp and Circumstance march No.5 in C major op.39 (위풍당당 행진곡)
Ralph Vaughan Williams - Five Variants of Dives and Lazarus
Franz Schubert - Sonata for Arpeggione and Piano in A minor, D821 1st Mov
Edward Elgar - Symphony No. 1 in A-Flat Major, Op. 55
Georg Friedrich Händel - Water Music Suite No.2 In D Major HWV 349 - II. Alla Hornpipe (헨델 - 수상 음악 모음곡 2번 라장조 HWV 349 - II. 알라 혼파이프)
Georg Friedrich Händel - Suite in B-flat Major, HWV 440: III. Sarabande (하프시코드 모음곡 중 사라방드)
Edward Elgar - Enigma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Op. 36 "Enigma": Variation II. H.D.S-P.
특히 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 중 사라방드"는 지금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는 그런 느낌을 절대 주지 않는다. 쓸쓸한 서재, 어두운 조명과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가 합해져, 장면을 보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매우 어려워진다. 워낙 곡 자체도 다양한 느낌이 들게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봤을 땐 그저 유신-무신의 논쟁 그 자체에 집중해서 봤던 것 같은데, 오늘은 다른 지점들이 더 흥미로웠다. 다수의 후기에서도 나오지만, 이 작품엔 정말 많은 소주제가 등장한다. 양심(도덕률), 고통, 행복, 성, 사랑, 죽음 등 정말 많은 텍스트가 90분간 휘몰아친다.
각 주제 하나로 논문 하나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연구도 토론도 활발한, 한 없이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주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보는 분이라면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놓치면 놓치는 대로 그냥 같이 흘러가면 좋을 것 같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기 조차 어렵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대신- 작품을 보며 머리와 마음에 잔뜩 생겨나는 물음표 가득한 감정을 오롯이 느껴보는 것도 재밌기 때문이다.
오늘은 나도 이런 태도였던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로이트가 가만히 앉아 라디오의 음악을 듣듯, 앞으로도 정답이 나올까 싶은 문제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 펼치는 그들의 지적 논쟁에 온전히 나를 맡겨 보았다. 그랬더니 인간, 선과 악, 인간 본질을 알고 싶어 하는 열정적인 두 학자를 느낄 수 있었던 회차였다.
두 학자의 '철학' 보다는 왜 그들이 그런 가치관을 갖고 살게 되었는지, 그들 인생에서 그들이 맺는/맺었던 관계와 그 의미, 그리고 그 지점들이 나에겐 어떻게 적용되는지 등이 고스란히 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그런 시간이었다.
다음에 볼 땐 얼마나 더 알차게 느껴질지 벌써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