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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 Jun 08. 2023

뮌헨의 프라이탁에서 마주한 우연

독일에서 살아가는 N세대 튀르키예인



고작 나흘을 가지고 한 나라를 판단하기에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느낀 주관적인 감상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는다. 일단 감상에 나쁜 건 없었으니 끄적여본다. 나름 잘 산다는 도시였던 뮌헨에선 독일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었다. 다 마시고 난 빈 물병을 마켓 안에 있는 기계 속에 넣으면 펀딩 형태로 돈을 되돌려 받았던 것들과 반려동물을 키우기 위해서 내야 하는 세금, 그리고 푸르던 녹음 속 어딜 가도 인도 옆에 꼭 붙어있던 자전거 도로 등등. 특히 자전거 도로를 시민들이 얼마나 중시하던지 나중에는 도보자로서 밟기에도 조심스러웠다. 그것보다 더 흥미로웠던 점은 이곳의 사람들이 '글루텐 프리'와 '비건'을 다른 음식들과 동일선상에 두고 바라본다는 점이었다. 플렉시테리언의 삶을 살았던 한국에서의 지난 나는 늘 일상에서 환경을 위해 용기를 내보려고 노력했지만 한국은 위에서 언급한 것들에 다소 특별함을 부여하는 느낌이었다. 여러 방면에서 살기 좋은 도시라는 점은 단번에 인지했다.


프라이탁이 정말 정말 잘 어울리는 도시

그래서 그런지, 이 도시에서 프라이탁 가방 하나는 꼭 장만하고 싶었다. 기존에 들고 다녔던 가방은 모로코 사막을 구르고 온 뒤로 제 기능을 못하기도 했고 다소 꾀죄죄했기 때문이다. 브랜드를 잘 알지 못하는 나조차 한국에서부터 눈 여겨보고 있던 브랜드, 프라이탁. 오래된 트럭 방수천과 자전거 바퀴 속 고무, 그리고 안전벨트의 끈을 이용해 완성되는 리사이클 가방 브랜드. 상당히 나가는 가격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유럽에 본고장을 두고 있으니 택스 프리까지 붙인다면 훨씬 싸게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절하게 갖고 싶었던 가방 한 가지를 위해 전 날 적정선의 가격과 대략의 디자인을 생각해 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프라이탁 매장에선 어디서 들어본 듯한 분위기의 노래들이 귀에 흘러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익숙한 노래. 튀르키예 전통 음식점을 가면 나오는 특유의 전통 음악이 한 곡, 두 곡도 아닌 여러 곡이 연이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함께 그 매장을 방문했던 후배와 후배의 지인은 카운터에 앉아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미모를 자랑한다는 들떠있는 목소리와 함께 빨리 가보라는 말을 연신 덧붙였다. 나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을 나만의 가방을 찾기 위해 고심을 하다가도 귓가에 심상치 않게 흘러들어오는 튀르키예 노래들에 이래 저래 정신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독일까지 왔는데 왜 이런 큰 브랜드에서 구슬픈 튀르키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거지 - 얼떨결한 마음이 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 빨간 카펫과 차이, 모자이크 램프가 있어야만 어울릴 것 같았던 음악이 세상 깔끔한 프라이탁에서 울려퍼지니 나름 힙스럽다고도 생각했다. 고른 가방 하나를 들고 카운터로 가 잘생긴 아르바이트생 옆에 있던 아주머니에게 고심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튀르키예 노래가 계속 나오네요. 혹시 튀르키예 노래 좋아하세요?"


지금보니 튀르키예인들의 부적과도 같은 팔찌를 차고 있으셨다!

너 일본인이지?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 - 라고 물어보는 말들을 하도 많이 듣다 보니 문득 이런 가치관이 깃들었다. 당사자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속으로 생각하고 말지, 나는 누군가의 민족성을 앞에서 그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판단하지 않겠다고. 그런 의미에서 튀르키예 노래를 좋아하는 독일인일수도 있으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운터에서 부지런히 가방의 택을 떼고 있던 아주머니는 씽긋 웃으면서 본인이 사실 튀르키예인이라고 했다. 긴장이 탁 풀리며 우리는 곧장 튀르키예어로 모든 계산을 진행하고 담소를 나눴다. 뮌헨의 거리 곳곳을 걸을 때마다 사방에서 튀르키예어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리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니 기분이 또 새로웠다. 앙카라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머물다 독일로 남편과 함께 이주해 작년에 영주권을 땄다는 아주머니는 내게 언어를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냐고 했다. 한국어와 튀르키예어는 어족이 같아서 (독일에서 알타이족 얘기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유사한 부분이 많아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다고 전했다. 그 대화 속에서 다정을 느꼈는지 아주머니는 속삭였다. 앙카라에서 온 한국인이라니, 특별히 할인을 해줄게. 또다시 나온 튀르키예인들 특유의 윙크와 함께 적지 않은 금액을 택스프리까지 합쳐 할인받았다. 선물로 주신 2유로짜리 에코백과 카드지갑은 여행 내내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우리는 연신 몇 번이고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작별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전철 안 맞은편에선 30분가량 전화하는 튀르키예인을 보았다.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손님맞이에 대해 무엇을 준비할지 아내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역시 다정과 환대로 점철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더 찾아보니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이 튀르키예인으로 그 수가 약 3백만 명에서 많게는 7백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유럽 여행으로부터 돌아와 들린 앙카라의 단골 카페 사장님도, 어학당 선생님도 튀르키예인들이 정말 많지 않냐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어학당 선생님은 나의 여행담을 듣다가 튀르키예계 독일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기 시작했다. 정리해 보자면 1)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독일에서는 튀르키예로부터 많은 노동자를 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리나라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떠올랐다. 패전 이후 '라인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뤄내고 있던 독일은 경제 활성화로 다양한 취업 기회가 열려 있었지만, 독일인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감행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 부족한 노동력을 아무래도 이런저런 국가로부터 채운 것 같다. 2) 그러나 독일이 어느 정도 안정된 이후로부터는 반튀르키예 감정도 상당했다고 한다. 특히 8-90년대에 그 감정이 고조되었다고. 유럽 연합에 속한 독일은 여전히 튀르키예의 유럽 연합 가입을 반대하니 국가가 어떤 식으로 튀르키예를 인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은 많이 잠잠해진 상황이지만 이 때문에 양국 관계가 크게 흔들렸던 적이 있다고 짚어주셨다.


내 여행이 쏘아올린 작은 공... 수업 2시간 내내 이 이야기를 했다. 이주, 이민, 전쟁과 정치. 큼직하게 써둔 Ön yargı는 편견을 의미한다

 나흘동안 거닌 뮌헨의 곳곳이 너무 좋아서, 이곳에 사는 튀르키예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이주자의 삶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행복한 여행자의 단편적인 생각이었다. 선생님은 고향을 그리워하던 1세대에 이어 2세대 3세대가 이미 독일에 자리를 잡아버린 상황을 설명하며 "그들을 튀르키예인이라고 부르긴 어려울 것 같아. 독일인이지, 이제."라는 말을 덧붙였다. 독일에서 유로로 돈을 번 뒤 튀르키예로 들어와 리라로 환전하면 떼돈을 벌 수 있으니 그런 방식으로 여행하는 튀르키예계 독일인도 많다고 했다. 불안정한 경제에 삶이 힘든 튀르키예 사람들은 탐탁지 않아 할 테고, 이 때문에 독일에 살고 있는 튀르키예인들은 자국으로 돌아와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도 한다고 했다. (이것 역시도 지극히 많은 케이스들 중 하나다.) 정치와 사회적인 이슈가 섞인 문제들이 늘 그렇듯, 어느새 독일에 살아가는 튀르키예인 이야기는 튀르키예에서 살아가는 중동사람들 이야기로 퍼져나가 있었다. 학당 사람들의 2/3이 중동에서 왔기 때문, 그들 역시 내가 모르고 있던 여러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 대통령 재집권과 연관된 예민한 이슈인지라 선생님은 그 열띤 토론을 잠재우며 "Dünya Görüşü(세계관)"를 강조했다. 세계관, 어떤 지식이나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나 틀을 의미한다. "Oraya gidip bakmam lazım." (그 사람들의 시선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어.)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단편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 의식해서 꾸준히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 작은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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