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이 자신을 단련하여 할 수 있는 극한의 결과치를 만들어 내면서도 삶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유머러스한 센스를 잃지 않는 우아함. 그런 것에 대한 선망이 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발레리나 강수진, 故 박완서 작가, 배우 윤여정 같은 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런 아우라. 나도 가지고 싶(었)다. 유명인사가 아니어도 주변을 돌아보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노력과 시간을 쌓아 자신만의 아우라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아우라는 오랜 시간 자신을 갈고닦았을 때에야 비로소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어떨 땐 아예 시작도 못하고 절절매기도 하면서 어떨 땐 또 지금 나의 삶과 관련이 적은 일인데도 너무 몰입하기도 한다.
나는 글로 나를 표현하고 싶고, 그런 글과 말이 나를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나 어렵게 느껴지고 언제쯤 조금이라도 나를 더 잘 표현하는 글을 쓰게 될진 모르겠다. 그래도 꿈이라도 꿔야 그 방향으로 길이라도 낼테니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고,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은 날이 이어지다가도 무언가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욕구는 남아 있음이 느껴질 때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글쓰기로 어딘가 있을 나만의 무엇 찾기.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이유는, 나를 표현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지금'을 살고 있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나를 데려갈 때가 많다. '지금'을 잘 살고 싶다고 '머리'는 조잘거리지만, '마음'은 닫은 채로 들은 채도 하지 않는 날이 많다.
새로운 지금은 매일 온다. 그 시간들을 어영부영 흘려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느냐고 머리가 계속 조잘거린다. '지금을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제발 하라고'
'지금을 잘 살기 위해' 글을 쓴다는 생각. '과거'는 분명 어찌할 수 없이 다 지나간 시간임을 알지만, 아직 다 풀지 못하고 들고 있는 몇 개의 시험문제 같은 게 있다. '그런 일이 있었지'하며 심플하게 내 마음속에서도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오길 바라는 일들.
어쩌면 게으르고 비겁한 나는, 결국 마지노선에 이르러서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게 뭔가 싶은 마침표를 찍을지도 모른다. 끝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마침표를 찍더라도, 그런 나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계속 쓰고 싶기도 하다.
오래도록 진심으로 글을 쓰더라도 닿기 힘든 어떤 지점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내 마음과 계속 대화를 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과거에 대한 심플한 마침표를 찍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유연한 태도로 유머를 잃지 않으며 사는 것, 그것은 영원히 로망으로만 머물 것이다.
단 하루라도, 몇 시간이라도, '지금 (잘) 살고 있다. 살아있다'는 생(生)감정을 느끼고 싶기에, 나는 느리더라도 놓지는 않고 계속 글을 쓰고 싶다.
이렇게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게츠비>가 떠오른다. 헛된 꿈을 꾸다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 게츠비.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헛될지라도,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 할지라도 희망과 낭만을 꿈꾸었다는 자체로 작가는 그를 위대함의 대명사로 그렸다.
나는 누군가에게 들킬일도 없는 혼자만의 생각을 하면서도 '희망'이나 '낭만'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여기곤 했다. 그러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고민을 하며 <위대한 게츠비>를 떠올렸고, 단 하루라도, 단 몇 시간이라도, '지금 잘 살고 있다'는 그 느낌을 진심으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느리더라도 놓지 않고 계속 글을 쓰는 방법으로 그 느낌을 찾아가고 싶다. 헛되든 어떻든, 나도 '나만의 위대함'을 '희망하겠다'는 마음이 드는 스스로가 조금은 괜찮게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