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에 모으는 한 글자 한글자

by 정안

매일 아침, 실패할 걸 알면서도 시도하는 것이 있다.

'피곤하다,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


교문에서 곧잘 훌쩍이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등교를 시키고 허겁지겁 출근을 한다. 퇴근시간을 지나 겨우 업무마감을 하고 '오늘도 화장실을 한 번도 못 갔구나' 하면서도 화장실 가는 시간을 또 포기하고 찝찝한 몸으로 신데렐라처럼 일터를 빠져나온다. 순간이동을 꿈꾸며 아이 곁으로 날아간다. 매일 학원이 문을 닫고도 2시간이나 지나는 시간 동안 학원로비와 길 위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이.

"엄마 배고파."

아무리 입이 짧고 마른 너라도 배가 고프지. 미안함이 한 겹 더 쌓인다. 허기와 미안함과 한숨을 가득찬 몸을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오래된 휴대폰 배터리가 갑자기 급 방전되듯, 오늘치의 에너지도 급격히 고갈된다. 몸은 무거워졌고 기운은 나지 않는다.


"엄마, 다리 아파요."

"그치?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집에 도착해 있을 거야."


나는 왜 이러고 살고 있지. 오늘치의 현타가 온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걸어 집에 도착한다.


익숙한 집 냄새에 잠시 마음이 놓일 뻔하다가 쌓여있는 집안일들 앞에 새로 출근한 기분을 느끼며 가방을 벗는다. 일단... 좀 뻗자. 할 일은 산더미이고 다 하기 싫다. 해야 할 일들도 매일 다 하지 못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가능한 건가? 내가 부지런하지 못하고 게을러서 못하는 건가? 알고 보면 할 일이라는 것들도 별일 아니고 금방금방 할 수 있는 것들인데, 내 마음이 건강하지 못해서 무겁게 느끼나? 난 왜 이렇게 살고 있지? 그만 그만. 지금은 그냥 오늘 하루의 피곤함이 몰려온 것뿐이잖아. 아 몰라 몰라. 일단 아무것도 하기 싫어. 못하겠어. 좀 쉬고 싶을 뿐이잖아.


하지 않으면 일상에 지장을 주는 식사, 빨래, 설거지, 쓰레기 치우기 등등을 한다. 하고 싶은 것이 많고 놀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를 어르고 달래 숙제를 시킨다. 씻으라며 화장실에도 보냈다가 이불속으로 보낸다. 잠이든 아이 옆에 허리 펴고 다리 뻗고 눕는다. 잠시 멍하다. 그때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마음이 느껴진다.


이불을 덮고 휴대폰으로 백지를 연다. 하얀 바탕에 작은 한 글자 한 글자가 꿀벌처럼, 개미처럼 모여든다. 나는 꿀벌이나 개미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그들처럼 한 입 한 입의 꿀 한 모금을 어딘가에 잘 모으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들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것 말고는 나의 알 수 없는 어떤 구멍을 아주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시작되면 그런 날이 오래가기도 하고, 그런 마음을 그만 가지고 털어내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렇게 백지위에 무슨 말이든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은 그 마음 자체가 반갑다.


내 생각이나 마음이 내 안에 있을 때는 말, 표정, 행동으로 밖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이가 알 수 없고, 글로 표현하지 않으면 어딘가 물성을 가진 채로 남지 않는다. 내 안에서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말이나, 내 안에서 글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나의 생각, 마음들을 누군가가 알게 되는 것이 즐겁거나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보다, 걱정스럽거나 부끄럽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내 안으로 담아만 둘 때가 많고, 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다. 내 생각이나 마음이, 내 안에 나만 아는 동굴에 있을 때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내가 어떤 형태로 주무르든 상관이 없지만, 내 안에서 바깥으로 나와 말이 되고 글이 될 땐, 정제되고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된다. 적어도 나를 돕는 글이 된다.


매일 아침, 실패할게 뻔한 '피곤하다, 힘들다는 말을 하지 말자'는 다짐은 계속할 것이다. 아이에게 내가 사는 모습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에 끌려 다니는 것 같이 비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피곤하다, 힘들다는 말만 자제하고, 나의 아우라는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과 걸음과 에너지를 뿜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매일 실패를 거듭하고 삶 자체를 망쳐가고 있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는 날도 있을 것이고.


매일 저녁, 늦게까지 이 학원 저 학원을 돌며 나를 기다리는 아이와 아침에 헤어진 지 12시간 만에 만나 집으로 가기 위해 손잡고 걷다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마음 같아선 집에 갈 때까지 업어주고 싶을 때도 많지만,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가야 할 곳에 혹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는 걸 아이와 함께 걸으며 알려주고 싶다. 그 길에 꽃이 피어있고 좋은 향이 나고 새가 노래할 때도 있겠지만, 오르막이나 꼬부랑 길이 이어져 피곤하고 힘든 순간도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이왕이면 '피곤하다, 힘들다'를 대신할 좀 더 지혜로운 표현을 찾아 피곤한 한 고비, 힘든 한 고비를 넘길 수 있기를 바란다.


좋아하는 노래 한 소절 흥얼거리기, 하늘을 올려다 보기, 힘이 나는 문장 떠올려 보기, 내 마음을 글로 옮겨보기 같은 것들로. 나와 우리 아이에게는 훈색 노을, 매일 조금씩 다른 위치에 뜨는 달 찾기, 보도블록 위 귀뚜라미나 습기 많은 날의 지렁이 같은 것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주고받는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이 피곤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다.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해가 지는 하늘색과 초승달이 예쁘다며 아이가 담은 사진. 자기 덕분에 예쁜 하늘 본거 고마워하라며 뿌듯해 하는 네 덕에 웃으며 마무리한 하루

한 걸음씩 걸어서 매일 작은 고비를 넘어 집으로 오듯, 한 글자씩 쓰며 삶 속에서 마주할 크고 작은 어려움을 지혜롭게 마주할 수 있는 다른 무엇들을 계속 찾아가고 싶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자는 아이 이불을 덮어주고 휴대폰으로 백지를 연다. 꿀벌처럼, 개미처럼 한 글자 한 글자를 모은다. 나는 꿀벌이나 개미처럼 부지런하지 않지만, 그들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가다 보면 달콤한 나만의 꿀단지를 채울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